5. 연예/문화

신간 ‘판타지랜드’….미국은 어떻게 트럼프를 만나게 됐을까

Print Friendly, PDF & Email
“내 이웃이 스무 명의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건 신이 없다고 말하건 그는 내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내 호주머니를 털어가지도, 내 다리를 부러뜨리지도 않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3대 대통령을 지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남겼다는 이 말은, 미국의 오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전통을 대변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게 뭐든 원하는 것을 믿을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당하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문화비평가인 커트 앤더슨은 오늘날 미국 사회가 뒤틀린 자유주의와 독선적인 개인주의로 치달으면서 전례 없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신간 ‘판타지랜드'(원제 Fantasyland·세종서적 펴냄)를 통해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종교적 도그마에 경도돼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진 미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판타지랜드

저자는 오늘날 많은 미국인이 현실감각을 상실해 비과학적인 허위 사실이나 거짓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초자연주의, 예언, 종교적 유사과학, 음모론에 몰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책에 따르면 자동차와 공장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의 주된 원인이라고 믿는 미국인은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3분의 1 이상은 지구온난화를 과학자와 정부, 언론인의 농간으로 믿는다.

또 미국인 3분의 2는 진짜 천사와 악마가 이 세상에서 활약 중이라 믿고, 3분의 1은 최근에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고 믿는다.

4분의 1은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고 믿고, 전직 대통령(버락 오바마)을 적그리스도로 생각한다. 5분의 1은 미국 정부 관리들이 9·11 테러에 가담했다고 믿고 있다.

저자는 주관적 신념에만 의존해 판단하고 자신의 믿음과 다른 현실은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을 ‘환상 기반 공동체’라고 칭하고, 이런 사람들이 다수인 미국 사회를 ‘판타지랜드’로 명명한다.

책은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와 정신적 습성의 기원을 찾기 위해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500여 년간 펼쳐진 북미 대륙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훑어내려 간다.

판타지랜드의 초석은 영국 청교도들이 물려준 복음주의 개신교와 지적 자유를 이상으로 삼은 계몽주의의 혼합물이었다. 여기에 금을 찾아 북미 대륙으로 건너온 투기꾼과 모험적 사업가, 사기꾼과 허풍쟁이가 가세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데 능하다는 것이다.

땅이 넓었던 탓에 공동체보다는 혼자만의 공간이 많았고, 몇 달이고 홀로 자기만의 생각과 느낌, 환상 속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미국은 한동안 환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균형과 강한 긴장관계가 형성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번영은 미국인들에게 판타지에 탐닉할 수 있는 여유를 줬다. 세계 시장을 장악한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판타지에 매달리는 미국인들의 재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균형추가 기울게 됐고 종교와 유사종교, 환상이 이성과 합리주의를 압도하게 됐다.

저자는 1990년대에 환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균형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 들어 지금과 같은 판타지랜드가 완성됐다고 본다.

골칫거리인 총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강박적 집착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낳은 미국 경제의 비이성적 과열 뒤에도 현실을 무시하는 환상주의가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은 판타지랜드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거짓 정보에 대한 대중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판단력을 흐린다. 이를 틈타 가짜뉴스가 판을 치게 됐다.

100년 이상 세계의 패권을 놓지 않고 있는 명실상부한 초강대국 미국. 700페이지가 넘는 책은 미국을 지구상에서 최상의 곳으로 여기는 자부심 강한 미국인들의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하다.

시종 저자의 어투는 신랄하고 어떤 때는 조롱조에 가깝다.

자국과 자국민에 대한 비판이 이토록 지독한 건 지금의 미국 사회에 대해 느끼는 위기감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생애 처음으로 미국이 혼란과 쇠퇴의 길로 완전히 접어든 건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런 식의 판타지랜드 현상이 지금까지 쭉 예외적인 나라였던 미국만의 운명인 것인지 궁금하다.”

저자는 판타지랜드가 트럼프 정부에 와서 정점을 찍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장 길게 쓴 마지막 45장의 상당 부분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할애한다.

이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하고, 지구온난화가 거짓말이라고 말해왔음을 환기한다. 그밖에도 허위 사실을 유포함으로써 판타지랜드에 기여해왔음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를 제시한다.

저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일찌감치 환상과 현실을 뒤섞는 미국인들의 습성을 간파하고 그런 마법적 사고를 이용할 만큼 영리했다고 평한다.

30년 전 쓴 그의 저서 ‘협상의 기술’에는 이렇게 적혀있다고 한다.

“나는 사람들의 환상에 맞춰서 움직인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가장 크고 가장 대단하고 가장 멋지다고 믿고 싶어 한다. 나는 과장의 순수한 형태인 그것을 정직한 과장법이라고 부른다.”

<연합뉴스>

Categories: 5. 연예/문화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