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어떤 기사를 내보내고는,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단하진 않아도, 나름 최선을 다한, 선한 영향을 주는 흠 없는 기사라고 생각했지만 거의 읽히지 않는 경우이다. 문구 하나를 위해 세심하게 팩트체크를 한, 그 노고와 정신을 취재 기자나 수정·승인한 데스크(상사)만이 안다. ‘언론이 좋은 기사를 안 써서 외면당한다’는 비판 한편으로, 사실 조회 수가 수백 회도 안 되는 ‘좋거나 괜찮은 기사’는 상당하다.
이유는 분명하다. ①더 파급력 있거나 특별한 에지(새로운 시도나 시선)를 갖춘 좋은 기사, ②소재나 인터뷰이가 시의성(혹은 재미) 있어서 전달 자체로 인기 있는 기사뿐 아니라 ③선정성만을 소구하며 조회 수를 빨아들이는 기사, ④함부로 써서 욕을 먹는 기사(혹은 칼럼)들에도 밀린다. ‘조회 수=수익’이라서 많은 언론사가 ③을 앞세워 언론의 질을 떨어뜨는 것도 사실이다.
잠깐의 외로움이나 허무함이야, “이 동네가 원래 그렇지 뭐”라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수개월 노력하고 몰입해서 내놓은 ‘역작’이 별로 읽히지 않을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얼마 전 아동인권 관련 기획 기사들을 쓴 후배 A를 화장실에서 마주쳤는데 “기사가 많이 안 읽힌다”며 힘들어했다. 다음 날 A와 같은 팀의 B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같은 좌절을 표했다. 나도 과거 느껴본 감정이라서, 둘에게 “사람들은 좋은 기사 (별로) 안 읽는다(절반 이상 사실이다)” “(제도 개선 권한을 가진) 담당 공무원 두 명만 기사를 보면 된다”는 말을 해줬다.
‘공무원(혹은 그 분야 전문가나 종사자) 두 명만 보면 된다’는 생각은, 독자 이목 끌기를 포기(혹은 실패)했을 때, 이 기사가 있어야 하는 존재 이유를 샅샅이 뒤져 도달한 ‘위안의 정원’이다. 기사는 실용의 영역이며 문학처럼 불특정 다수의 마음을 적시는 빗줄기가 될 수 없는 바에야, 틀린 말도 아니다. 특히 정책 분야를 오래 담당해온 나로서는, 꼭 쓰고 싶은 어떤 제도나 문제들이 있는데도, 그걸 기사나 칼럼으로 써봤자 거의 읽히지 않을 것이란 걸 사전에 미리 안다. 그래서 예전 한 칼럼을 쓸 때는 아무도 읽지 않더라도, 기획재정부 담당 공무원은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목을 ‘기재부 지침이 바꿀 수 있는 것들’이라고 달았다.
우리들(기자들)끼리 하고 말 이야기를 칼럼을 통해 하는 이유는, 기자들이 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한번쯤 알리고 싶어서인 것 같다. 전통적인 ‘언론’의 틀이 무너져가고 기성언론과 유튜브언론 중 ‘누가 더 해악을 끼치는 쓰레기인지’를 두고 대립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사실 나는 언론에 대한 거창한 기대는 없다. 다만 읽히건 읽히지 않건 지금 현재 이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제대로 포착하고 보도해서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시도와 고민이, 답이 보이지 않는 언론의 위상 자체를 고민하는 것보다 더 언론이 바로 서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B가 “이런 기사(많이 읽히지 않는 아동인권 기획)를 쓰지 말아야 하는지”를 물었는데, 나는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대중의 선호 기사와 사회에 꼭 필요한 기사 사이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전략적·기술적으로 개선할 것을 찾는 것과 별도로, 후자를 지향하는 마음까지 위축되어서야 되겠는가. 바라는 것은 독자들의 칭찬이 아니라(그건 불가능하다), 칭찬이 없더라도 지속하는, 패배하지 않는 마음이다.
이진희 사회정책부장 (river@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