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에이 시가 말하는 ‘인권’이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묻고 싶어지는 풍경이다. 매번 신고가 들어가면 시는 텐트 주변 쓰레기와 오물만 치우고, 몇십 분 뒤면 똑같은 캠프가 다시 세워지는 일상이 되풀이된다. 시민이 체감하는 것은 공공 안전의 회복이 아니라, 더러워진 노숙 캠프의 ‘미장센’만 갈아 끼운 듯한 허탈감이다.
끝없이 돌아오는 텐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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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촌이 한 번 정리되면 그 자리는 잠깐 깨끗해지지만, 거주자들은 몇 블록 옮겼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인근 다른 동네로 번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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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는 늘어나는데, 캠프는 줄지 않고 ‘이동’만 반복되니 시민들은 “이건 청소 서비스지 해결책이 아니다”라는 냉소를 쏟는다.
이 과정에서 남는 것은 피로감이다. 출근길 인도와 버스정류장, 학교 주변이 잠깐씩 비었다가 다시 점령되는 사이, 불안과 분노는 서서히 시민의 기본 정서가 되어 간다.
인권의 이름으로 소시민을 지운 도시
최근 시와 카운티, 주정부는 ‘인권’과 ‘존엄’을 내세우며 강제 퇴거보다는 서비스 연계를 우선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시민이 체감하는 메시지는 전혀 다르다. 캠프 주변 상가와 주민들은 밤마다 고성, 난폭한 행동, 마약 의심 행위에 시달리지만, 시정 연설문 속에서 이들의 불안과 눈물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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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은 모두의 공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텐트촌의 영구 점거지처럼 변해 아이들과 노인들이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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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를 존중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정작 소시민의 안전과 휴식, 이동권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인권은 선택지가 아니다. 노숙인도 시민이고, 주변의 주민과 상인도 똑같은 시민이다. 그럼에도 정책의 말끝은 늘 노숙인의 권리에서 멈추고, 그 옆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 애쓰는 이들의 권리는 종종 괄호 속에 감춰진다.
진보의 언어, 불신의 현실
엘에이 시와 카운티, 주정부는 서로를 탓하며 ‘연방정부가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시민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풍경으로 보인다. 위에서는 책임 공방이 오가고, 아래에서는 “어차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학습된 체념과 무질서가 번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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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캠프 철거를 둘러싼 실랑이가 계속되자, 일부 노숙인은 단속을 ‘협상 카드’로, 일부 시민은 시정부와 경찰의 지시를 ‘선택적’으로 따를 뿐인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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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법과 규칙을 느슨히 대하고 서로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면, 시민 또한 법과 규칙을 가볍게 여기는 법이다.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남는 것은 각자도생뿐이다. 그 여파는 결국 교통법규, 치안 협조, 세금 준수 등 도시 시스템 전반에 파고든다.
숫자는 줄었다는데, 왜 체감은 더 나쁜가
공식 통계는 최근 2년 연속으로 엘에이 지역 노숙 인구가 소폭 감소했다고 말한다. 대규모 주거 지원 프로그램과 캠프 정리, ‘인사이드 세이프’ 같은 사업의 효과라는 설명도 뒤따른다. 하지만 이 수치들은 출퇴근길, 학교 앞, 동네 골목에서 마주치는 풍경과 잘 겹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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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는 줄었다는데, 학교 담장 옆 텐트와 골목길 카트 행렬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시민들의 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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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장기적으로는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시민이 겪는 것은 오늘 밤 아이를 데리고 그 길을 지나가도 되는지에 대한 즉각적인 불안이다.
숫자는 희망을 말하지만, 현장은 피로를 말한다. 이 간극이 계속 벌어질수록, 정책 홍보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언어로 들리기 쉽다.
“존중”과 “질서”를 함께 말할 수는 없는가
노숙인의 존엄과 건강을 지키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민의 안전과 일상의 평온보다 항상 앞에 놓여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 정책은 이미 공공성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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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신고가 들어오면 ‘청소’만이 아니라, 일정 시간 이후 재설치를 금지하고, 대체 쉘터·주거 제공 여부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최소한의 질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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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주변, 주거 밀집 지역, 상가 밀집 구역 등은 비상구역으로 지정해 텐트촌 상시 설치를 금지하고, 대신 그만큼의 예산과 인력을 실제 주거·치료·재활 지원에 투입해야 한다.
엘에이의 소시민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다. 새벽마다 깨끗한 인도로 학교에 가는 아이의 뒷모습, 퇴근 후 집 앞에서 안심하고 차 문을 여는 몇 초의 여유, 공원 벤치에 주저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도감이다.
“인권”이 이 작은 일상들을 지워버리는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시정부가 답해야 할 차례다. 과연 누구의 도시를, 누구의 존엄을 먼저 지킬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