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 블러버드의 VIP들

엘에이 한복판, 윌셔와 세인트 앤드류스 사이에 한때 거대한 가림막과 펜스가 세워져 있던 공사장이 있다.

메트로 공사를 위해 수년 동안 공사 차량과 자재로 가득 찼던 그 부지는 공사가 끝나자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젠 그곳을 점령한 것은 굴착기가 아니라 텐트, 쇼핑카트, 임시 부엌과 거실을 대신하는 각종 잡동사니들이다.

지금 그 빈터 앞 인도는 사실상 ‘캠프촌’이다. 길 한복판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의자와 침낭이 인도를 가로질러 놓여 있어 보행자는 차도로 피해 내려가야 할 때가 많다.

악취와 쓰레기, 밤마다 들려오는 고성 속에서 인근 주민들은 집 앞 거리를 지날 때마다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만, 정작 이 거리를 완전히 장악한 사람들은 아무 제약 없이 머무른다.

이 도시는 누구에게는 끝없이 참을성 많고, 누구에게는 끝없이 무심하다. 그 결과 이들은 사실상 ‘거리의 VIP’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 현상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메트로 공사가 끝나면, 그 자리는 깔끔한 광장이나 공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무주공산’으로 남는다.

그 공백을 가장 먼저 채우는 것은 언제나 노상 텐트들이다.

한인타운과 인근 지역의 다른 빈터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돼 왔다. 거대한 천막촌이 만들어지고, 운동기구나 작은 텃밭까지 갖춘 반(半)영구적 생활 공간으로 변해가는 사이, 주변 상인과 주민들은 환경 악화와 치안 불안을 호소한다.

그러나 시는 사유지·공공지 여부, 조례 적용 범위, 인권 논란 등을 이유로 ‘직접 개입’을 거부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곤 한다.

그 사이 이 도시의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메트로 D라인 연장 공사는 당초 교통난 해소의 해법으로 포장됐지만, 공사 기간 연장과 비용 상승으로 시민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땅속에 돈을 묻는 공사”라는 냉혹한 표현까지 나온다.

윌셔 일대를 수년 동안 파헤치고도 정작 지상은 방치된 채, 그 자리를 홈리스 캠프촌이 차지하도록 내버려둔 결과를 보면, 정말로 교통 문제 해결이 우선이었는지, 아니면 공사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홈리스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시와 주, 연방 정부는 매년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예산을 “홈리스 해결”이라는 이름으로 쏟아 붓고 있다.

그러나 거리의 풍경은 시민이 체감하기에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학교·도서관 주변 텐트촌을 제한하는 조례가 있다 해도, 실제 집행은 느리고 들쭉날쭉하다.

그 사이 주민들은 “시청 브리핑과 예산표 속에서는 위기가 해결되고 있지만, 우리 눈앞의 골목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신호다. 문제보다 더 큰 건, 시민이 제도와 정치에 대한 신뢰를 잃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엘에이는 큰 도시이고, 경제 규모도 크다. 그래서인지 정치인과 관료들은 “조금 더 써도 버틸 수 있다”는 식의 안이함에 길들여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큰 저수지도 밑바닥에 구멍이 나 있으면 결국 마른다.

메트로 공사에, 홈리스 대책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프로그램에 ‘물 쓰듯’ 돈을 쓰면서도, 정작 거리 한복판 무단 점거와 주민의 공포를 방치하는 도시가 건강한 도시일 수는 없다.

윌셔와 세인트 앤드류스의 빈 공터 앞을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이 도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세금을 성실히 내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밤길을 두려워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평범한 시민들일까,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고 결정을 미루는 정치인과 행정일까.

혹은, 어떤 책임도 요구받지 않은 채 거리를 점령한 채 살아가는 소수의 ‘거리 VIP’들일까.

시민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이념도, 화려한 슬로건도 아니다. 약속한 공사라면 제때, 합리적인 비용으로 마무리할 것. 공사를 위해 사용한 부지라면, 다시 시민의 공간으로 돌려줄 것.

조례를 만들었다면, 논란이 두렵다는 이유로 외면하지 말고 공정하게 집행할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우선순위가 ‘주민의 안전과 일상’이라는 상식을 회복하는 것.

윌셔의 VIP들을 더 이상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이 도시의 진짜 주인인 시민을 위해 질서를 회복할 것인지는 결국 시와 정치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을 강요하고 감시하는 힘은, 불편을 입속에만 삼키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시민에게서 나온다.

이 글을 읽는 또 다른 주민이 있다면, 오늘 저녁 한 번쯤 그 거리의 풍경을 떠올려 봐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묻기를 바란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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