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사진 촬영은 오랜만이라 어떻게 웃어야 할지 어색하네요.”
지난 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에 나선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중·장거리 간판 김보름(32)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손하트’ 등 요청받은 포즈를 마다하지 않고 하나하나 해내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냈다. 그렇게 몇 차례 플래시가 터지고 나자, 그제야 김보름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사실 김보름이 마음 편하게 웃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는 2014년 소치올림픽, 2018년 평창, 2022년 베이징까지 세 차례 올림픽에 연속 출전한 한국 빙속의 상징 같은 선수다. 그러나 올림픽에 대한 기억은 늘 눈물과 함께였다. 평창에서는 매스스타트 은메달을 따고도 빙판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고, 베이징에선 대대적인 응원에 감격해 또 한 번 눈시울을 붉혔다. 최근에야 TV에 얼굴을 비치며 웃는 모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우리 딸, 이제 꽃길만 걷길”

지난해 12월 3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은퇴를 선언하며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을 앞둔 시점이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그는 “올해(2025년)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를 결정했다”며 “어린 시절 얼음 위에 처음 발을 디딘 날부터 스케이트는 제 삶의 전부였다. 꿈을 따라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고 적었다. 이어 “선수 생활은 여기서 마무리하지만, 많은 어려움과 좌절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선수로 기억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김보름은 지난해 12월 3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은퇴를 선언했다. 김보름 SNS 캡처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하지만 그는 긴 설명 대신 대표팀 생활에 대한 감사와 묵묵히 응원해 준 이들에 대한 인사만 남겼다. 간결하고 차분하게 정리된 은퇴 선언이 더 큰 울림을 남긴 이유다. 김보름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적어두었던 글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많이 절제해서 눌러 담았다”고 말했다.

김보름이 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20대 중반부터 은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운동한 날보다 앞으로 할 날이 더 적게 남았다는 걸 매년 느꼈다”며 선수로서 고민을 털어놨다. 은퇴를 알리자 “고생했다”는 격려와 함께 “축하하는 게 맞는 건가?”라는 연락도 이어졌다. 김보름은 “은퇴가 슬프다면 슬픈 것일 수도 있으니까”라며 조용히 웃었다.
가장 마음에 남는 메시지는 어머니에게서 왔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것 많이 하면서 행복하게 꽃길만 걷기를 바랄게.” 김보름은 휴대폰 화면에 담긴 그 문자를 공개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
“8년간 단 하루도 잊은 적 없지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에 나선 김보름과 박지우, 노선영의 모습. 연합뉴스
한때 ‘제2의 이상화’라 불릴 만큼 촉망받던 유망주였다. 2010년부터 2024년까지 14년간 태극마크를 달았고, 18세던 2011년 동계아시안게임 3,000m 은메달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2012~13시즌과 2016~17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선 매스스타트 종합 1위를 차지하며 평창 올림픽 메달 후보로 급부상했고, 실제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박수와 환호가 아닌, 논란으로 덮였다. 팀 추월 경기에서 ‘왕따 주행’ 의혹이 제기되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당시 김보름과 박지우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고, 같이 뛴 노선영은 한참 차이를 두고 뒤늦게 들어왔는데, 이를 두고 ‘두 선수가 노선영을 따돌렸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한 중계방송사 해설진의 발언이 불을 붙였고, 급기야 ‘김보름 국가대표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에는 무려 60만 명이 넘게 동의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김보름이 은메달이 확정되자 관중석을 향해 큰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5위를 차지한 김보름이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뉴스1
그는 “8년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그 일이 떠오르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지금은 이렇게 덤덤하게 얘기하지만요”라고 회상했다. 그때 버틸 수 있었던 건 대표팀 동료들 때문이었다. “이상화 언니, 모태범 오빠, 김민선, 박지우… 그들이 버팀목이었어요.”
다행히, 긴 터널 끝에는 진실이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 특별 감사에서 ‘고의성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고, 허위 주장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일부 승소했다. 특히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당시에도 소송이 진행 중이었는데, 메달 획득엔 실패했지만 4년 전과 달라진 응원 분위기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원망이 없었을 리 없다. 김보름은 그러나 “안 좋은 감정을 붙잡고 있어 봐야 힘든 건 나뿐이었다. 기억은 지울 수 없고, 과거도 바꿀 수 없으니 ‘그땐 그냥 그랬구나’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또 살아가야 하니까”라고 말했다.
“방송인, 제2의 인생 응원 바라요”

김보름이 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사진촬영을 하며 어색하게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최근엔 ‘선수 김보름’보다 ‘방송인’ ‘예능인’으로 더 자주 불린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방송사 섭외가 줄을 이었고, 각종 예능에 출연하며 대중과 거리를 좁혔다. 현재는 예능 프로그램 ‘야구 여왕’에 출연 중이다. ‘방송인이란 옷이 제법 잘 맞는 모양’이라는 질문에 그는 “촬영이 재미있다.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야구에 도전할 때도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뭐든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예능프로그램 ‘야구여왕’에 출연 중인 김보름. 방송 영상 캡처
‘복면가왕’ ‘노는 언니’ ‘씨름의 여왕’ ‘마녀체력 농구부’ 등에서 예능인으로서의 워밍업을 마쳤다. 2022년 ‘씨름의 여왕’에서는 준우승까지 차지하며 ‘국대’ 출신의 운동신경을 뽐냈다. 추성훈이 소속된 연예기획사에 들어가 본격적인 방송 활동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보름은 “운동선수 말고도 할 게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 이것저것 다 경험해 보고 싶다”면서 “일단 해봐야 뭘 잘하고 못하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며 웃었다.
앞으로는 여행처럼 “자신을 솔직 담백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능에 도전하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까지의 김보름과는 다른 모습도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이것저것 준비하고 배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제가 춤 빼고는 다 잘할 수 있거든요.” 웃으며 던진 이 말속에는, 이제야 진짜 자신의 삶을 시작한 김보름의 담담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