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축구 돌풍 김상식 감독, “마법은 없다, 땀만 있을 뿐” [인터뷰]

김상식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달 25일 하노이 베트남 축구협회 사무실에서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향후 목표를 밝히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지금 베트남 축구는 ‘상식의 시대’다. 굵직한 경기마다 승리를 이어가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현지 매체에서 김상식(50)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날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뜨거운 베트남 분위기와 달리 김 감독의 시선은 차분했다. 지난달 25일 하노이 베트남축구협회(VFF)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인기는 거품처럼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대회 준비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3개 메이저 대회 제패

김 감독은 연말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인터뷰 이튿날인 26일 아침에는 카타르로 전지 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1월 6일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2026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아시안컵 조별리그 경기를 대비한 준비였다.

지난달 18일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시안게임(SEA)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동남아 강호 태국을 상대로 3-2 대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컵을 들어올린 지 불과 일주일 만이었다. 우승의 여운을 즐길 시간조차 없었다.

베트남 축구대표팀과 김상식 감독이 지난달 18일 태국 방콕 라자망갈라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동남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기쁨을 나누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베트남 축구대표팀과 김상식 감독이 지난달 18일 태국 방콕 라자망갈라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동남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기쁨을 나누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2025년은 말 그대로 ‘김상식의 해’였다. 지난해 1월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미쓰비시일렉트릭컵(현 현대컵) 우승을 시작으로, 아세안축구연맹(AFFU-23 챔피언십(7월), SEA게임(12월)까지 동남아 3개 메이저 대회를 모두 제패했다. 2024년 5월 지휘봉을 잡은 지 1년 반 만의 성과다. 베트남 축구 역사에서 이 세 대회를 모두 우승으로 이끈 사령탑은 김 감독이 처음이다. 박항서 전 감독(2017~2023년 재임)도 이루지 못한 기록이다.

현지 매체들은 이를 두고 ‘김상식 매직’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마법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선수들이 흘린 땀과 노력, 열정이 만든 결과라는 설명이다. 이정수 수석코치, 이운재 골키퍼 코치, 윤동헌 피지컬 코치 등 ‘김상식 사단’의 역할도 강조했다. 코치진의 전문성과 협회의 지원이 더해졌기에 가능한 성과라고 공을 돌렸다.

베트남에서 ‘친형’ 리더십

한국에선 시련을 겪었다. K리그1 전북 현대에서 선수와 코치, 감독으로 15년을 보냈지만, 2023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팀을 떠나야 했다. “숨이 막혀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할 정도였다”고 그는 돌아봤다.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 한국의 축구 에이전시 디제이 매니지먼트의 이동준 대표를 통해 베트남 대표팀 감독 제안을 받으며 낯선 땅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됐다. 디제이 매니지먼트는 앞서 박 전 감독을 베트남축구협회에 추천한 곳이기도 하다.

김상식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나달 25일 하노이 베트남 축구협회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김상식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나달 25일 하노이 베트남 축구협회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베트남 대표팀을 맡는다는 건 박 전 감독이 남긴 유산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김 감독은 “박항서 감독님이 만들어 놓은 베트남 축구를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마음뿐”이라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또 박 전 감독이 ‘아버지 리더십’으로 선수와 팬들에게 ‘파파 박’이라고 불렸던 점에 빗대 자신의 스타일을 ‘친형 리더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훈련 땐 엄격하면서도 평소에는 스스럼없이 선수들을 대하는 형 같은 존재라는 얘기다.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과 유사한 ‘띵감(정 문화)’으로 선수들과 신뢰를 쌓고, 개개인의 장단점을 파악해 역할을 분명히 하면서 거리감을 좁혀갔다. 이 과정에서 현지 선수와 팬들 사이에서 ‘아잉 사우(anh sáu)’ ‘터이 사우(thầy sáu)’라는 별명도 얻었다. 각각 ‘식 형’, ‘식 선생’쯤 된다. ‘사우’가 베트남어로 숫자 6을 뜻하는데, 김 감독 이름 끝 글자 ‘식’이 영어 6(Six)와 발음이 비슷한 데서 비롯됐다.

이런 소통 방식은 경기 운영에서도 변화를 만들었다. 현지 매체들이 높이 평가하는 대목도 용인술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들을 과감히 기용해 선수층을 넓혔다는 평가다. 일간 탄니엔은 “김상식 감독이 가져온 가장 큰 가치는 베트남 축구가 더 이상 특정 ‘황금 세대’에게만 의존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라고 분석했다.

김상식 감독이 베트남 국가 '띠엔 꾸언 까(진군가)'를 외우기 위해 한글로 적은 모습. 그가 베트남 국가를 부르는 모습은 현지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김 감독 제공

김상식 감독이 베트남 국가 ‘띠엔 꾸언 까(진군가)’를 외우기 위해 한글로 적은 모습. 그가 베트남 국가를 부르는 모습은 현지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김 감독 제공

이 같은 접근은 그의 축구관과 맞닿아 있다. 김 감독은 감독을 ‘필드 위 셰프’에 비유했다. 어떤 재료를 선택할지, 그 재료로 어떤 맛을 낼지 고민하고, 재료가 충분치 않아도 최선의 조합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전술을 조정하는 과정 역시 이 같은 관점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베트남 가교 역할도

베트남에 ‘우승 유전자(DNA)’를 되돌려 놓은 김 감독의 인기는 연일 높아지고 있다. 어디를 가도 알아보고 반가워해 주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그가 베트남 국가 ‘띠엔 꾸언 까(진군가)’를 외워 부르는 장면은 현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통역사 도움을 받아 가사를 한글로 적어가며 연습했고, 유튜브 영상까지 찾아보며 반복해서 익혔다고 한다. 베트남 국민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최근에는 베트남 유력 일간지 뚜오이쩨가 귀금속 대기업 PNJ와 협력해 순금 24K로 제작된 5억 동(약 2,800만 원) 상당 특별 금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메달에는 한국과 베트남의 국기와 국화, 한국 궁궐과 베트남 전통 모자가 함께 새겨졌다. 한·베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베트남 일간 뚜오이쩨가 김상식 감독에게 전달한 24K 순금 금메달. CTV 캡처

베트남 일간 뚜오이쩨가 김상식 감독에게 전달한 24K 순금 금메달. CTV 캡처

김상식호(號)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베트남 축구대표팀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진행 중인 AFC U-23에서 개최국이자 우승후보로 꼽히는 사우디 등을 꺾고 전승을 거두며 A조 1위로 8강에 올랐다. 잠을 하루 4시간 이내로 줄이며 경기 분석에 매달리고, 선수 발굴을 위해 3부 리그까지 발품을 판 결과다.

그러나 김 감독은 안주할 생각이 없다. 그는 “한 나라의 축구 역사에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건 큰 영광”이라며 “이 기록에 머무르기보다 선수들과 함께 더 높은 기준을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생겼다”고 말했다.

시선은 이미 더 먼 곳을 향해 있다. “베트남이 동남아를 넘어 아시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장기적으로는 월드컵에 진출하는 꿈에 동참하고 싶다. 선수들과 함께 계속 도전하겠다.” 김 감독의 목표다.

김상식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U-23 축구대표팀이 12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프린스 압둘라 알파이살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조별리그 A조 마지막 3차전에서 개최국 사우디아라비아를 꺾은 뒤 기념 촬영을 하고

김상식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U-23 축구대표팀이 12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프린스 압둘라 알파이살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조별리그 A조 마지막 3차전에서 개최국 사우디아라비아를 꺾은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베트남 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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