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제프리 엡스타인과 그의 측근들로부터 정치 후원금을 받는 데 주저가 없던 미국 정치인들이, 엡스타인 관련 문건이 추가로 공개되고 여론이 들끓자 뒤늦게 ‘도덕적 거리두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잇따른 기부금 반환과 기부 약속은 진정한 성찰이라기보다, 폭로가 현실화된 뒤에야 서둘러 몸을 빼려는 정치적 본능에 가깝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오하이오 연방 하원의원 조이스 비티 의원은 억만장자 레슬리 웩스너에게서 받은 총 6만1,100달러의 후원금을 성매매·인신매매 피해 생존자 지원 단체 등 지역 단체에 기부했다고 밝혔습니다.
웩스너는 빅토리아 시크릿 모회사로 알려진 L 브랜즈의 창업자로, 수십 년간 엡스타인의 재산을 관리해 온 핵심 후원자이자 최근 공개된 법무부·FBI 문건에서 잠재적 ‘공동 공모자’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논란이 커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선거관리 자료를 살펴보면, 웩스너 부부의 돈은 비티 의원뿐 아니라 공화·민주 양당을 넘나들며 여러 정치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흘러들어 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오하이오에서는 공화당 존 휴스티드 부지사가 2001년 이후 웩스너로부터 10만 달러가 넘는 후원금을 받아 왔고, 공화당 마이크 캐리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 후보 버니 모레노 역시 웩스너로부터 수천 달러 규모의 후원을 받았지만, 일부는 돈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로드아일랜드에서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현지 조사에 따르면 엡스타인과 오랜 관계를 유지해 온 인사들로부터 최소 2만5,000달러가 여섯 명의 정치인에게 흘러들어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나 레이몬도 전 주지사는 링크드인 공동 창업자 리드 호프먼, 전 재무장관 래리 서머스, 스포츠 에이전시 CEO 케이시 워서먼, 대형 로펌 수장 브래드 카프 등 엡스타인 인맥으로 꼽히는 인물들로부터 총 1만 달러의 후원금을 받았습니다.
주지사 후보였던 헬레나 폴크스 전 민주당 후보 역시 서머스로부터 6,000달러, 호프먼으로부터 1,000달러 등 최소 7,000달러의 후원금을 받았고,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뒤늦게 자선단체 기부를 약속했습니다. 워서먼의 후원금은 레이몬도 전 주지사와 전 주 재무관 프랭크 카프리오에게 총 4,000달러가 전달됐고, 카프의 2,000달러는 전부 레이몬도 전 주지사에게 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 차원에서도 ‘선택적 분리’가 반복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는 1990년대 엡스타인으로부터 받은 수만 달러 규모의 후원금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더 최근의 일부 기부에 대해서만 환불 또는 동일 금액의 기부로 상쇄하는 방식을 택해 비판을 받았습니다.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 스테이시 플래스킷 하원의원 등은 2019년 여론이 거세지자 뒤늦게 여성·인신매매 피해자 지원 단체에 같은 액수를 기부하며 “엡스타인 돈과의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문제는 이 같은 ‘손절 퍼레이드’가 엡스타인이 이미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한 뒤, 그리고 관련 인맥과 자금 흐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이후에야 본격화됐다는 점입니다.
유권자와 피해자들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왜 지금인가.” 도덕적 기준이 분명했다면, 2008년 첫 유죄 판결 직후나, 최소한 2019년 연방 기소와 사망 직후에는 이 돈을 거부하거나 반환했어야 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의 뒤늦은 기부금 ‘정화 의식’은 피해자 연대라기보다, 여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이미지 관리에 가깝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수표를 다시 쓰는 행위만으로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누가 언제 어떤 경로로 이 돈을 받았는지, 그 대가로 어떤 접근과 영향력이 거래됐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엡스타인의 권력 네트워크를 정당화하거나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에 대한 투명한 설명과 제도 개선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이번 ‘엡스타인 손절 쇼’는 또 다른 위기가 닥쳤을 때 손쉽게 교체될 소모품 같은 도덕성 퍼포먼스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 커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