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연기의 달인’ 박정민은 어떻게 멜로 장인이 됐나?

영화 '휴민트'의 박정민. 샘컴퍼니 제공

‘짜증 연기’의 달인 박정민이 멜로에 도전했다. 잔뜩 찌푸린 표정 사이로 슬며시 드러내는 애틋한 감정 표현이 일품이다. 짤막한 설명만으로 상상해야 하는 러브스토리의 빈틈에 그럴싸한 개연성을 부여하는 연기. 지난 11일 개봉한 영화 ‘휴민트’가 첩보물의 외피를 두른 멜로영화로 작동하게 하는 데 있어서 박정민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영화에서 가장 비중이 큰 조과장 역의 조인성보다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정민은 애초에 ‘휴민트’를 멜로영화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구출하는 액션 영화라고 생각했지 박건과 채선화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깊게 표현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그런데 촬영이 시작돼 연기를 하다 보니 감정이 좀 더 짙어지는 느낌을 받았죠. 어쩌면 멜로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건 촬영 중간쯤이었어요.”

영화 제목인 ‘휴민트’는 사람(Human)과 기밀·정보(Intelligence)의 합성어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취득한 정보를 뜻한다. 영화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인 채선화(신세경)를 둘러싸고 국정원 요원 조과장과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이 대립하면서도 공조하는 상황을 그린다. 박건은 옛 약혼녀 선화가 남한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공적 임무와 이루지 못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 대사가 많지 않은 캐릭터여서 주로 주변 인물의 대사로 설명된다.

영화 ‘휴민트’. NEW 제공

“박건은 원리·원칙주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에게 충성하는 아주 이념적인 인간이어서 선화가 떠난 것이고, 그렇게 원리와 원칙을 중요시하던 사람이 무언가를 크게 잃었을 때 느끼는 심정의 변화 그리고 잃어버렸던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의 신념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자신의 신념과 개인적 감정 사이에서 갈등해 보지 않은 사람이 처음 갈등하기 시작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보니 그런 감정을 다루는 것이 무척 서툴어요. 또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색해서 늘 침묵하는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박정민이 박건을 연기하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여러 작품을 알려줬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도 있었고 프랑스 고전 누아르 영화, 007 시리즈 등도 있었는데 류 감독이 가장 많이 언급한 것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버리는 남자들의 이야기”, 즉 ‘첩혈쌍웅’ ‘영웅본색’ 같은 홍콩 누아르 영화들이었다. 박정민은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하며 더 혼란스러웠다”며 웃었다.

박건은 극 중 가장 큰 내적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등장인물들 사이에선 감정을 숨기면서도 관객에겐 이를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러시아 마피아와 결탁한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이 선화의 약점을 이용해 박건을 압박하려 할 때 인물의 갈등과 연기의 난도는 증폭된다. 박정민은 최소한의 대사로 최대한의 감정을 드러내야 했다.

영화 ‘휴민트’의 박정민. 샘컴퍼니 제공

“저는 대사에 기대는 배우여서 말을 해야 감정이 나오는데 말 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하니 너무 어렵더군요. 가끔은 열연을 했다고 생각하고 촬영 후 모니터를 보면 형편 없어 보이기도 했어요. 그냥 아무것도 없이 화보 찍을 때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경우에 더 좋은 표정이 나오기도 했죠. 그런 연기는 계속 모니터를 해가며 만들어갔습니다.”

류 감독의 이전 작품인 ‘밀수’에서 10㎏가량 체중을 늘려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야망을 품고 있는 장도리 역을 맡았던 박정민은 ‘휴민트’에선 평소보다 10㎏를 빼서 날렵한 체형을 만들었다. 액션 연기도 계단에서 떨어지는 장면처럼 일부 위험한 부분을 제외하곤 대부분 직접 했다. “체중은 이미 줄인 상태여서 여백을 정리한다고 할까. 러닝 위주로 붓기도 좀 뺐어요. 할 때와 안 할 때 얼굴 형태가 다르더라고요. (라트비아 로케이션 현장에서는) 아침이든 밤이든 달린 뒤에 촬영장에 가는 식으로 준비했죠.”

영화 ‘휴민트’. NEW 제공

박정민의 멜로 연기는 가수 화사의 뮤직비디오 ‘굿 굿바이’에 출연하며 주가를 올리고 있다. 특히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화사의 축하 무대를 함께했던 영상은 입소문을 타며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받는 이상한 선물 같은 것”이라며 “’그냥 그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휴민트’는 박정민의 연기 스펙트럼을 한 단계 넓힌 영화로 기억될 만하다. 그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성을 목표로 하는 인물을 연기해본 듯하다”면서 “만족할 정도인지는 모르겠고 제 눈에 오그라들 정도로 아주 이상해 보이지는 않아서 ‘그럼 됐다’ 정도로 혼자 위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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