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의 개인정보 유출사태가 한미 외교·통상 현안으로 확전하고 있습니다. 23일 미국 하원 법사위원회에 해럴드 로저스 쿠팡 한국 법인 임시대표가 소환됩니다. 쿠팡을 겨냥한 한국 정부의 수사가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인지 따져 보겠다는 의도입니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도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차별 없는 수사를 당부했다고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죠.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이름조차 생경한 한국 이커머스(전자상거래) 1위 업체 쿠팡은 어떻게 미국 정부와 의회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일까요. 전문가들은 쿠팡의 모회사인 쿠팡아이엔씨(Inc.)의 로비(Lobby·대관) 능력을 주목합니다. 기업의 로비가 국가 간 관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게 낯설게 들릴 수 있겠지만, 미국의 정치·외교사를 들여다보면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청원권 보장 위해 마련됐다가 자본의 도구로 전락한 로비

2008~2025 연간 미 로비 지출 규모. 그래픽=김대훈 기자
로비는 민주국가에서 개인의 청원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정치행위입니다. 돈을 내면 전문가가 대신 의회와 행정부를 찾아가 제도 개선이나 입법의 필요성을 호소해주는 시스템이죠. 문제는 자본력이 로비의 성패를 가른다는 데 있습니다. 자본이 풍부한 거대 기업일수록 막강한 인맥과 능력을 갖춘 전문가를 고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더 강하게 관철할 수 있으니까요.

미 무역대표부(USTR) 민간 자문위원의 84%는 기업 및 로비스트 관련 인사. 시각물=김대훈 기자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관행이 ‘회전문 인사’입니다. 정부 고위 관료나 의회 핵심 관계자가 퇴직 후 기업 임원이나 로비스트로 자리를 옮겨 ‘옛 동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이죠. 미 통상 감시단체 ‘리싱크 트레이드(Rethink Trade)’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미 무역대표부(USTR)에 기밀 자료 접근 인가를 받은 무역자문위원 479명 중 84%가 다국적 기업 출신이거나 로비스트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이 “기업 로비스트들이 USTR 자문위를 장악해 무역질서를 주무르고 있다”고 비판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쿠데타까지 만들어낸 로비…외교를 압도하다

중앙정보국(CIA)의 과테말라 체제 전복 작전인 ‘PB석세스 작전’ 문서. 바나나 다국적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와의 연계관계도 담겨있다. 미 인터넷 기록청
로비가 외교를 넘어 타국의 정치 체제까지 뒤집은 극단적인 사례도 있습니다. 1954년 과테말라에서 있었죠. 다국적 바나나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United Fruit)는 과테말라 정부의 토지개혁으로 자사 농장이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자 워싱턴 로비망을 가동했습니다. 자사 출신의 미 국무장관과 그의 친동생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전면에 나섰습니다. 기업을 향한 정부의 이익 침해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포장됐고, CIA의 여론전과 체제 전복작전이 이뤄지면서 과테말라에는 친미 정권이 들어서게 됐죠.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후신인 치키타(Chiquita)도 로비를 통해 국가 간 무역에서 이권을 챙겼습니다. 유럽연합(EU)이 1993년 바나나 수입 할당제를 발표하자, 치키타는 ‘자유무역 훼손’이자 ‘미국 기업 차별’이라고 반발했습니다. 이후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는 무역보복을 정당화한 ‘무역법 301조’를 동원해 유럽에 보복관세를 가하며 무역 분쟁을 불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치키타가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기부한 사실이 폭로됐죠.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기고문을 통해 “자유무역 체계는 기업의 로비를 받은 서구 관리무역 체계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미국 2,700개 다국적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개도국들의 규제 주권을 침해한 외교 압박의 산물”이라고도 지적했죠. 이처럼 기업의 로비활동은 글로벌 시대에 외교와 통상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해왔습니다.
빅테크와 트럼프가 만났을 때…”디지털 규제·수사는 곧 차별”

2020~2024 미국 내 빅테크 로비 자금 등록 추이. 그래픽=김대훈 기자
최근 다국적 기업들은 엄격한 규제 당국이 있는 국가에서 정면 돌파를 시도하기보다, 본국인 미국의 정치권을 움직여 우회적인 외교 압박을 가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김인성 매사추세츠 공과대(MIT) 부교수와 헬렌 밀너 프린스턴대 교수는 연구 논문에서 그 이유를 민주주의 기반이 탄탄하고 이익집단 활동이 활발한 국가일수록 다국적 기업이 현지에서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제한되기에, 익숙한 본국 정부를 통한 ‘외교적 지렛대’를 선호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016년 퀄컴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으로 과징금을 부과하자, 퀄컴은 곧바로 워싱턴 정계에 ‘부당한 차별’이라고 호소하며 미국 의회와 법무부의 개입을 끌어냈습니다. 상대국에서 발생한 규제 리스크를 미국의 외교적 관여를 통해 해결하려 한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퀄컴의 전방위적인 로비 정황은, 퀄컴의 독점적 시장 지배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며 미 의회에 서면 진술서를 제출했던 경쟁사 인텔의 폭로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의 로고가 데스크톱 디스플레이에 떠 있다. 이들은 미국의 대표적 다국적 빅테크 기업들이다. AFP 연합뉴스
기업의 이익 보호를 위해 미국의 외교력을 동원하는 일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출범 이후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특히, 메타와 알파벳 등과 같은 빅테크 기업은 로비의 규모와 정교함을 극적으로 끌어올려 미국의 관여를 견인하고 있죠.
2019년 프랑스 디지털세가 대표적입니다. 프랑스도 로비가 합법적인 국가죠. 프랑스는 당시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에 대해 디지털 매출의 3%를 과세하는 ‘디지털세’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프랑스가 아닌 미국을 상대로 전방위적 로비를 펼쳤습니다. USTR는 직권으로 불공정 무역에 대한 보복조치를 정당화하는 무역법 301조 적용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공개된 최종보고서에는 로비단체들이 작성한 백서의 목차와 핵심 단어까지 그대로 쓰였습니다.
로비 데이터분석 단체 ‘오픈시크릿츠’에 따르면 메타, 아마존, 알파벳 등 3개사는 ‘디지털세’ ‘무역법 301조’ 등을 명목으로 2019년 2~3분기 로비 자금으로 약 2,210만 달러를 썼습니다. 로비를 받은 USTR은 공청회에서 프랑스 의원이나 기관은 부르지 않고 빅테크 옹호론자들과 싱크탱크 인사들만 불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노골적으로 보복관세를 예고했습니다. 전방위 압박에 프랑스는 결국 디지털세 징수를 유예했습니다.
소비자권리 보호단체 ‘퍼블릭시티즌’의 리샤브 베일리 연구위원은 본보에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와 저녁 식사를 한 뒤 디지털 규제를 하는 국가는 응징하겠다고 공언해왔다”며 “이런 흐름을 보면 빅테크의 요구와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통상) 정책 결정 사이 인과 관계는 분명해 보인다”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쿠팡 워싱턴 로비, 미국 정책 아닌 한국 수사에 효과?”

쿠팡이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자체 조사해 발표하는 과정에서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고발된 해럴드 로저스 쿠팡 한국 임시대표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에 출석하며 입장을 밝히고 있다. 윤기훈 인턴기자
쿠팡의 행보도 다르지 않습니다. 블룸버그통신은 의회에서 증언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쿠팡의 워싱턴 로비 공세가 성공했다는 증거라고 평가했습니다. 쿠팡의 모회사 쿠팡아이엔씨는 2022~2024년 약 550만 달러를 로비 자금으로 쓰고,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과 연결된 로비업체들을 대거 영입했습니다. 그 성과는 한국 정부의 수사를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로 포장해 미 하원의 소환장 발부와 부통령의 우려 표명, 전관·협회들의 비판으로 나타난 것이죠.
디지털법 전문가인 아누팜 찬더 조지타운대 교수는 “한국의 수사가 가혹해 보이는 건 맞지만, 국민적 분노가 큰 사안에 대응해온 방식과 일관성을 띤다는 점에서 이를 ‘차별’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쿠팡 사태는 빅테크 문제라기보단, 백악관과 워싱턴 정계에 접근성이 높은 거대 투자자들의 논리가 설득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2021~2025 쿠팡아이엔씨(Inc.) 연간 미국 로비 지출 규모. 그래픽=김대훈 기자
퍼블릭시티즌의 멀린다 세인트 루이스 무역감시부 국장은 “의회 감독위원회에 접근해 청문회와 소환장을 이끌어내는 것, 옛 상사나 동료를 찾아가 특정 의제를 밀어붙이는 것 모두 로비에서 흔히 쓰는 전술”이라고 말했습니다. 쿠팡의 로비스트 타일러 그림은 로저스 대표에게 공개 소환장을 보낸 짐 조던 하원 법사위원장의 정책·전략 수석을 지낸 바 있습니다.
단기적으로 쿠팡의 로비를 통한 ‘외교전 비화’ 전략은 통할지도 모릅니다. 미국 빅테크에 대한 규제를 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 속에서, 한국 정부의 외교적 부담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리한 로비의 역풍은 역사가 보여줍니다. 미국의 압박에 유럽은 오히려 ‘디지털 주권’을 강화하고 있고, 브라질도 특정 계정 차단을 거부했던 엑스(X)를 전면 차단해 결국 규제를 준수하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쿠팡 매출의 90%는 한국 시장에서 나옵니다. 한국 소비자 신뢰가 곧 생존과 직결되죠. 막강한 로비력으로 당장의 수사 압박은 늦출 수 있겠지만,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치명적 과실을 한미 외교 마찰의 방패 뒤로 숨기려고 하면 국내 소비자의 신뢰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국적 기업의 무리한 로비가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쿠팡의 다음 출구 전략이 궁금합니다.
[한국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