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월 SBS 드라마 ‘모래시계’는 최고 시청률 64%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김종학(1951~2013) PD-송지나 작가 콤비가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에 이어 만들어낸 또 다른 성과였다.
김 PD와 송 작가는 ‘모래시계’ 방영 전 해인 1994년 회사를 함께 세웠다. 제이콤이었다. 그해 할리우드 흥행술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손잡고 영상산업 진출을 선언한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이 자본금(20억 원)의 50%를 댔다. 제이콤의 제이(J)는 김종학의 종, 송지나의 지, 이재현(현 CJ그룹 회장) 당시 제일제당 상무의 재에서 착안한 거였다. 이런 연유로 일각에서는 제이콤을 ‘쓰리(3)제이콤’이라 불렀다.
제이콤의 첫 성과가 ‘모래시계’였다. 제이콤은 드라마 제작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영화와 애니메이션까지 아우르며 영상산업 전반에서 활약하고 싶어했다. 김 PD와 송 작가는 특히 영화를 향한 갈망이 강했다.

김종학(왼쪽부터) PD와 배우 박상원, 신영균, 최민수, 송지나 작가, 배우 고현정이 SBS 드라마 ‘모래시계’ 자축연에서 케이크를 함께 자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이콤은 처음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증권가에 자리를 잡았다. 제일증권(현 한화투자증권) 사옥에 둥지를 텄다. 여의도 방송가와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제이콤은 1995년 사무실을 옮겼다. 영화를 하기 위해서는 서울 충무로 일대에 근거지가 있어야 한다는 영화계 출신 한 직원의 조언이 작용했다.
1990년대는 영화와 방송 사이 칸막이가 두껍고 높은 시절이었다. 영화인과 방송인 사이 사업 교류는 거의 없었다. 영화인들이 제이콤 관계자들을 만나러 굳이 여의도쪽으로 올 이유가 없다는 게 해당 직원의 판단이었다. 제이콤이 정말 영화를 하고 싶다면 한국 영화계 본산인 충무로로 가야한다는 논리였다.
김 PD와 송 작가의 결단은 빨랐다. 사무실 이전이 바로 이뤄졌다.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가 입주해 있던 남산빌딩(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이 새 둥지였다. 제이콤은 2000년 문을 닫을 때까지 이곳에서 영화 ‘인샬라’와 ‘산부인과’ ‘억수탕’(1997)을 제작했다.
제이콤의 이사에 얽힌 사연은 당시 충무로가 한국 영화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충무로는 오래도록 한국 영화계의 중심인 동시에 동의어였다. 한국 영화사 대부분이 이곳에 머무르며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충무로에 자리 잡고 있는 영화사는 거의 없다. ‘한국 영화=충무로’ 등식이 성립되지도 않는다. 31년 전 국내 영상산업의 총아로 떠오르던 제이콤이 원활한 사업 진행을 위해 이사를 감행했던 곳이라는 걸 감안하면 믿기 힘든 변화다. 충무로에는 어떤 급변이 있었고 어떻게 한국 영화의 대명사를 잃게 된 걸까.
수십 년 동안 한국 영화 중심지

1991년 영화 ‘잃어버린 너’를 상영하는 서울 중구 퇴계로 스카라극장 앞에 관객들이 몰려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중심지로서 충무로의 역사는 깊다. 한국 영화사의 시작부터 함께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국내 최초로 ‘활동사진’의 첫 상영이 이뤄진 곳이 충무로였다는 자료가 있다. 책 ‘우리 영화 100년’(2001 현암사 펴냄)에 따르면 영국 런던타임즈 1897년 10월 19일자 보도에 활동사진의 조선 첫 상영이 묘사돼 있다. ‘1897년 10월 상순경 조선의 북촌 진고개의 어느 허름한 중국인 바라크 한 개를 3일간 빌려서 가스를 사용하여 영사하였’다는 내용이다. 영화가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1895년 발명된 후 2년 만에 조선 반도에 도착한 것이다. 바라크는 가건물을 말하며 진고개는 지금 충무로2가 일대다.
국내 초기 극장 중 하나가 충무로에 있기도 했다. 1906년 11월 문을 연 송도좌다. 을사늑약과 한일 강제 병합으로 일본인 유입이 급증하면서 충무로는 급속히 서울 중심지가 됐다. 거주민 90% 가량이 일본인으로 혼마치(본정통)라 불리며 번성했다. ‘본정통’은 ‘도시 중심가의 길’을 가리킨다.
1910년 전후 종로 일대 북촌에는 극장 단성사와 원각사 등이, 남촌(혼마치)에는 경성좌와 수좌 등이 각각 자리 잡으며 흥행 경쟁을 펼쳤다. 영화 상영을 둘러싼 북촌과 남촌의 경쟁 구도는 해방 이후 종로와 충무로의 다툼으로 이어졌다. 충무로와 인접한 을지로4가와 퇴계로에 1913년 국도극장이, 1935년 스카라극장이 생기며 충무로의 영화 권력은 커져갔다.

1994년 ‘태백산맥’이 상영 중인 서울 종로구 종로3가 단성사 앞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종로3가는 충무로와 더불어 오래도록 한국 영화를 이끈 지역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해방 이후 충무로는 서울 중심지 역할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극장은 성업하기 마련이었다. 1957년에 충무로 일대인 초동에 명보극장이, 1958년 충무로에 대한극장이 문을 열었다. 종로3가에는 1958년 피카디리극장과 메트로극장(훗날 서울극장)이 개관하며 단성사와 더불어 ‘종로3가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충무로 을지로 일대와 종로3가의 영화 흥행 시장 양분체제는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영화사들은 충무로와 을지로, 종로3가에 포진했다.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낮은 충무로에 더 밀집하는 경향이 컸다. 충무로라는 도로명이 한국 영화를 대표하게 된 배경이다.
강남 개발이 부른 영화계 균열

2000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씨네하우스의 외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0년대까지 국내 극장 운영과 영화 상영 체계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예전엔 영화를 전국에서 동시에 대대적으로 개봉하지 않았다. 서울 중심지 극장과 지방 주요 도시 극장 몇 곳에서 먼저 개봉한 후 작은 도시나 서울 변두리 극장에서는 뒤늦게 순차적으로 상영하는 식이었다. 영화사들 입장에선 충무로 을지로 일대와 종로3가 극장 개봉이 흥행의 관건이었다. 주요 극장들은 영화사를 별도로 운영하며 극장이라는 플랫폼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충무로 흥행 권력’이 시간이 갈수록 강해진 이유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며 ‘충무로 흥행 권력’에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1970년대 서울 강남 개발로 새로운 흥행 시장이 열리면서다. 영화사와 극장들이 새로운 시장 개척을 외면할리 없었다. 충무로 메이저 영화사로 꼽히던 동아수출공사는 1985년 역삼동에 동아극장을 열었다. 강남권 첫 극장이었다. 이후 충무로 을지로 일대와 종로3가에 기반을 두고 있던 영화인들이 강남권에 속속 진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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