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효교수의 한국사람 사는 이야기]
2024년 일본의 한 요양원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습니다. 노인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은 간병인이 아니라 부드러운 실리콘 재질의 로봇 팔이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그 장면은 따뜻했고, 또 어딘가 서늘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경계 어딘가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깊어질수록 돌봄의 위기는 더 가파르게 다가옵니다. 한국은 2025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는데,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선 반면 요양보호사 등 돌봄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남아있는 인력조차 극심한 감정노동과 낮은 처우에 소진되어 갑니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로봇이 호명되며 일견 합리적인 해법처럼 보입니다. 로봇은 지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24시간 곁을 지킵니다.
그러나 돌봄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밥을 먹이고, 약을 챙기고, 낙상을 방지하는 행위일까요?
사실 치매 어르신의 손을 잡고 이름 모를 옛 노래를 같이 흥얼거리는 일, 임종 직전 "괜찮아요,잘하셨어요"라고 속삭이는 일, 그 사람의 눈빛에서 오늘의 기분을 읽어내는 일, 이것들도 돌봄이고,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돌봄의 본질입니다.
로봇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일본의 'PARO'는 쓰다듬으면 반응하는 물개 로봇으로, 치매 노인의 불안을 실제로 완화시킨다는 임상 결과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AI 돌봄 로봇이 독거노인의 말벗이 되고 낙상 감지 센서로 안전을 지키는데, 기능만 놓고 보면 놀라운 수준입니다.
하지만 PARO를 안고 위안을 얻는 노인의 모습은, 동시에 진짜 손길이 닿지 못하는 현실의 쓸쓸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핵심 질문은 "로봇이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로봇에게 맡겨도 되느냐"입니다.
돌봄을 로봇에 위탁하는 순간, 우리 사회는 조용히 어떤 책임을 내려놓게 됩니다. 노인 돌봄이 '해결된 문제'로 처리되면, 돌봄 노동자의 처우 개선이나 가족 돌봄에 대한 사회적 지원 같은 더 근본적인 과제들이 뒤로 밀릴 수 있습니다.
기술이 구조적 문제를 봉합하는 반창고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로봇 돌봄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낭만적 오류로 보이고, 현실의 돌봄 현장은 낭만과 거리가 멉니다.
인력이 없어 한 명의 요양보호사가 여러 노인을 동시에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로봇이 낙상을 감지하고 복약 시간을 알려준다면 그것은 분명 사람의 삶을 구하는 것이고, 이런 기술의 도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분법이 아닌 원칙입니다. 로봇은 돌봄의 '효율'을 담당하되, 돌봄의 '온기'는 사람이 책임져야 합니다.
투약 관리, 안전 감시, 이동 보조는 로봇에게. 그러나 대화, 공감,존엄을 지키는 시선은 인간에게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 경계를 어디에 그을지는 기술이 아닌 사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결국 로봇 돌봄 논쟁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노인을, 장애인을, 아이를,아픈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요. 돌봄을 비용으로 보는걸까요?, 관계로 보는걸까요. 로봇이 돌봄의 일부를 맡는 미래는 이미 오고 있습니다.
그 미래가 따뜻할지 서늘할지는, 로봇의 성능이 아니라 그 로봇을 어떤 마음으로 도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요양원에서 노인의 손을 잡은 로봇 팔 사진을 생각할 때 그 사진이 따뜻하게 느껴지려면, 그 로봇 곁에 여전히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로봇이 손을 잡는 동안, 인간은 눈을 맞추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입니다.
어쩌면 로봇 돌봄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 모릅니다.
당신은 마지막 순간에 누구의 곁에 있고 싶은가. 그 대답이 여전히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로봇을 들여오는 것보다, 돌보는 사람을 지키는 일이 먼저일 수 있습니다.

이지효,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
jihyol@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