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제창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처음엔 근면‧자조‧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농촌의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러다 점차 도시와 직장, 공장 등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범국민적 지역개발운동으로 발전했고, 대중동원, 정신계몽 운동의 양상을 띠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40주년을 맞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정부 수립이후 국가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책’으로 꼽힐 정도로(2010년 4월 22일자 조선일보 보도.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조선일보 공동조사) 새마을운동은 국민들의 인식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김대중도 생전에 “국민들 사이에 하면 된다는 정신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긍정 평가했다.
가뭄 대책 논의하다 시작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새마을운동을 제창한 것은 1970년 4월 22일 가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지방장관대책회의에서였다. 시장과 도지사, 농촌행정 일선 책임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박정희 농가주택 개량, 소득 증대, 산과 하천 환경 정리, 경지 정리, 도로 닦기, 부락 공동 오락 및 교양 시설 만들기 등 다양한 사업과 활동을 자발적으로 벌이는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 또는 ‘알뜰한 마을 만들기’라는 명칭도 제시했다.
이날의 연설 전체를 살펴보면 원고 없이 즉흥적으로 쏟아낸 느낌을 준다. 하지만 5,000년 동안 계속돼온 농촌의 빈곤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조 자립 협동을 통해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의 핵심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대통령 기록관, 지방장관 한해 대책회의 유시. 1970년 4월 22일. 훗날 4월 22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매년 새마을운동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1972년 전북 지역에서 주민들이 도로 정비 작업을 하고 있다. 당시 새마을운동은 경지 정리, 도로 정비, 교량 건설 등 농촌 인프라 개선 사업을 벌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제창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숙성의 과정이 있었다. 가깝게는 1969년 8월 초 유례없이 참혹했던 경남 지역 수해현장을 전용열차를 타고 돌아본 뒤 귀경할 때였다. 전용열차가 경부선 경북 청도읍 지역을 통과할 때 박정희는 돌연 열차를 멈추게 했다. 차창 밖으로 주민들이 합심하여 수해복구 작업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서였다. 그는 열차에서 내려 신도리 마을의 안길, 하천과 산림이 잘 정비된 모습을 둘러보고,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의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박정희는 신도리 마을의 사례를 새마을운동의 모델로 삼았고 이 마을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꼽히게 되었다(청도군. ‘새마을운동 발상지 청도 새마을 운동 42년 발자취’, 2012).
청도 수해복구 작업,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정책…새마을운동에 영감주다
멀게는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 시절의 농촌진흥정책 현장 체험이 있다. 박정희가 이 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당시 조선총독부는 총독 시책으로 농촌진흥정책에 주력하고 있었다. 교사들이 농촌 부락의 지도를 맡고 학교가 농촌개발운동을 이끌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이 시책에 따라 박정희 교사는 2곳의 시범 농원에 나가 강의를 하고 현장 지도도 했다. 이 농촌진흥정책은 ‘자립, 근검, 협동공영, 충군애국’의 정신 강조 및 ‘농촌 진흥가’ 보급 등 새마을운동과 여러모로 유사한 면이 있었고, 이 때의 경험이 훗날 새마을운동 추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조갑제, ‘박정희 1’).

농촌 주택의 지붕개량은 새마을운동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1년부터 본격화한 새마을운동은 농촌지역의 지붕개량, 마을 진입로 확장, 소규모 다리 건설 등 농촌 인프라를 크게 개선했고, 농가소득 증대로 도농 간 소득격차 완화에도 기여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면 된다’는 국민의 진취적 의식 변화와 근로의욕 고취로 산업화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성공적인 지역개발 모델로 인정받아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여러 개발도상국에 전파되고 국제개발사업(ODA)에도 활용되고 있다.
농촌 출신 필자는 중학생 시절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생생하다. 방학 중에는 아침 일찍 마을 초·중학생들이 모여 청소도 하고 길가 잡초를 제거한 뒤 코스모스를 심었다. 1970년대 대부분의 농촌 마을에서 가을이 오면 길 따라 무성하게 핀 코스모스 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다. 요즘 농촌에서는 가을에 코스모스 꽃을 보기 힘든데, 마을에 코스모스를 가꿀 아이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5년 전북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 소금실 마을 어귀의 코스모스 길.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학생들이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어 농촌 마을에 코스모스길이 많았지만, 지금은 코스모스길이 많이 사라졌다. 연합뉴스
새마을운동의 성과에 대해 비판적 견해도 있다. 농촌의 발전과 소득 증대에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새마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시기는 이농현상이 본격화한 시기와 겹친다. 집집마다 젊은이들이 학업과 취업을 위해 농촌을 떠났고, 가족 전체가 도시로 이주해 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인 추세이기도 했다. 산업화에 따라 도시에서는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고, 출산율이 높고 인구가 많았던 농촌 지역은 그 노동력의 주된 공급처로 역할했다(황병주, ‘박정희 이데올로기’, 돌베개, 2026).
도시로 몰린 농민들…농촌 빈곤 문제 해결엔 한계 드러낸 새마을운동
농촌이 도시에 비해 빈곤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는 농촌의 주된 수입원인 정부의 곡물수매가가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저임금 도시 노동계층을 위해서는 저곡가 정책이 필요했고, 산업화는 결국 농촌과 농민의 희생 속에 추진되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대중이 의원 시절 박정희 정부의 농업정책과 새마을운동을 강력히 비판한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구술된 ‘육성회고록’(한길사, 2024)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박정희 정권의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서 도시로 몰려들었어요. 산업화 과정에서 농민이 노동자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속도와 방식이었어요.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의 경제수준이 낮아지다 보니 갑자기 너무 많은 농민이 대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갑자기 늘어난 노동자들에게는 또 저임금 정책을 썼어요. 그러나 농민에서 노동자로 직업만 바뀌었을 뿐 빈곤한 것은 동일했어요.(후략)”

농촌에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도시 지역까지 확대돼 범국민적 지역개발운동으로 전개됐다. 1972년 서울 영등포에서 주민들이 하천 정비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런 비판에도 정부는 새마을운동이 1973년 종합적으로 체계화되고 지속적인 운동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고 자평했다. 새마을운동이 주민의 정신계발, 사회질서의 확립과 사회개발,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한 경제개발, 생활양식의 근대화 운동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또 1970년대 새마을운동 전개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평가했다. 1971~1973년 기반조성 단계에서 1974~1976년 자조발전 단계를 거쳐 1977~1981년 자립 완성단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내무부, ‘새마을운동 10년사’, 1980, 황병주 앞의 책에서 재인용).
농가 주택 개량에 진심이었던 박정희 “예산 늘리자”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농가주택 개량에 진심이었다. 1979년 초 내무부가 박 대통령의 뜻을 반영해 계획한 농가주택 개량사업 규모는 9만 5,000호였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의 예산배정은 3만호에 불과했다. 내무부의 농가주택 개량사업 업무보고 도중 경제기획원의 예산실장이 예산 지원 관련 차트 보고를 할 때 이 사실을 안 박 대통령은 “나도 농촌 출신인데 더 투자합시다”라고 강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현확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각하, 경제의 안정구도를 갖고 나가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시멘트를 비롯한 건설자재 값과 건설노임의 상승, 그리고 재정부담 때문에 축소가 불가피합니다”라고 단호하게 잘랐다.

1978년 1월 박정희(왼쪽) 대통령과 함께 이동하고 있는 신현확(오른쪽) 보건사회부 장관. 훗날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는 신현확은 농촌주택 개량사업 예산을 늘리라는 박정희의 지시를 거부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예산실장의 보고가 재개되고 차트가 세 장쯤 더 넘어갔을 때 박 대통령은 “어이, 예산실장! 차트 다시 한 번 넘겨봐”라며 3만 가구로 추진한다는 ‘문제의 차트’로 다시 돌아가게 한 뒤 “그래도 6만 가구는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어때, 부총리?”라고 간청하듯 얘기했다. 신 부총리는 이번에도 “안 되겠습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반대했다. 박 대통령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말없이 차트만 쏘아보았고, 업무보고 자리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당시 보고를 했던 예산실장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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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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