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돌아 집에 왔지만, 오디세우스는 다시 떠났다 ‘오디세이’ [이준학의 스크린리포트]

Filmmaker Christopher Nolan interacts with actor Tom Holland on the red carpet during the Mumbai premiere of The Odyssey, in Mumbai, India, July 11, 2026. REUTERS/Francis Mascarenhas

지난 칼럼에서 예상했던 것처럼 8월 5일 한국 개봉과 함께 남가주 한인 관객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LA 한인타운의 Regency Koreatown과 부에나파크 소스몰의 Regency Buena Park 8 & 4DX @ The Source, 한인들에게는 구 CGV 극장으로 더 익숙한 두 곳에서 드디어 한국어 자막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The Odyssey)를 볼 수 있게 된것이다. 미국에서 이미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작품이라 큰 기대를 갖고 극장을 찾았다.

<오디세이>는 7월 17일 미국에서 개봉한 이후 첫 주말 북미에서 약 1억2,4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출발했고, 8월 초에는 전 세계 흥행 수입 10억 달러를 돌파하며 놀란 감독의 역대 최고 흥행작으로 올라섰다.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감안해 업계에서 예상했던 손익분기점도 이미 훌쩍 넘어섰다. 기대가 크면 오히려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를 거의 모두 보았고, <다크 나이트> 이후에도 그의 신작을 늘 큰 기대 속에서 기다렸다.

물론 <인터스텔라>처럼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도 있었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조금씩 아쉬움이 남았던 것도 사실이다.

작품이 부족해서라기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이름에 내가 요구하는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오디세이>는 기대 이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감히 놀란 감독 최고의 역작 가운데 하나이며, 21세기 영화사에 오래 남을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를 보면서 2004년 5월 미국에서 개봉했던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Troy)가 떠올랐다.

당시 영화는 볼프강 페테르젠 감독이 연출했지만 제작 과정에서 놀란 역시 감독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었다.

결국 놀란은 <트로이>가 아닌 <배트맨 비긴즈>를 선택했고,그것은 훗날 <다크 나이트> 3부작으로 이어졌다.

20여 년이 지나 그는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트로이 전쟁과 그 이후의 세계로 돌아왔다. 영화를 보고 나니 오히려 그때 <트로이>를 만들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이번 작품에는 지난 20여 년 동안 축적된 놀란의 영화적 경험과 철학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3,000년 전의 고전을 현대적인 슈퍼히어로 영화처럼 만들어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쟁과 결투 장면은 거대하지만 ‘멋있어 보이기 위한 액션’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검을 휘두르는 영웅을 멋있게 포장하기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승리한 사람 역시 그 상처를 평생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대 세계 역시 지나치게 깨끗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바위와 흙, 거친 바다와 바람, 낡은 배와 지친 육체가 화면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의상과 무기, 배와 건축물 역시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만들기보다 거칠고 원시적인 느낌을 살렸고, 전투에서도 현대 액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동작과 화려한 기술보다 육체와 육체가 부딪히는 무겁고 투박한 싸움을 보여준다.

신화 속 괴물과 초자연적인 존재들마저 단순한 판타지의 볼거리라기보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욕망, 유혹을 현실 속에 끌어내린 듯하다. 놀란은 3,000년 전의 이야기를 오늘날의 영화 문법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것이 아니라 관객을 3,000년 전의 세계 속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함께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리스 연합군은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전쟁은 무려 10년 동안 계속되고, 결국 오디세우스가 생각해낸 ‘트로이 목마’ 계략으로 그리스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트로이를 함락시킨다.

전쟁은 끝났고 이제 영웅은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왕국 이타카로 돌아가는 데 다시 10년이 걸린다. 10년의 전쟁과 10년의 귀향, 결국 <오디세이>는 한 남자가 20년 만에 가족에게 돌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이타카라는 장소에 도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만나는 수많은 존재와 사건들은 단순한 모험을 넘어 인간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고난과 유혹을 떠올리게 한다.

연꽃을 먹고 고향을 잊어버리는 로토파고이는 현실에서 도망쳐 편안함 속에 머물고 싶은 인간의 유혹처럼 보이고,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폴리페모스는 힘과 폭력의 공포인 동시에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는 오디세우스의 오만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을 유혹하는 세이렌은 인간의 욕망과 호기심,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게 하고,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야 하는 선택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처를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순간과 닮았다.

오디세우스를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칼립소의 섬은 어쩌면 가장 무서운 유혹이다. 고통 없는 삶과 사랑,심지어 영원한 삶까지 약속받을 수 있지만 그곳에 머무는 순간 그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영원히 잃게 된다.

결국 오디세우스가 싸워야 하는 적은 괴물들만이 아니다. 망각, 욕망, 오만,두려움, 안락함, 죄책감,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마지막이었다. 처음에는 영웅이 집으로 돌아오는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오디세이>는 오히려 영웅이라는 껍질을 벗고 한 인간으로 돌아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의 승리자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략을 생각해낸 사람이고 수많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영웅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영웅의 뒤편을 바라보게 한다. 트로이가 불타던 밤 자신이 승리를 위해 선택했던 일들, 자신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동료들,그리고 영웅의 역사에서는 쉽게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돌아보게 한다.

영웅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가.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진짜 여행은 이타카에 도착하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는 왕도 영웅도 아닌 한 인간만 남는다.

나는 이것을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종교마다 그 의미와 방법은 다르다.

불교에서는 집착과 무지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해탈을 이야기하고, 가톨릭에서는 기도와 성찰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표현과 교리는 다르지만 내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살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때로는 멈추어 서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시간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디세우스처럼 10년 동안 바다를 떠돌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려는 마음과 노력이 필요하다.

종교가 그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철학이 안내하기도 하며, 때로는 3,000년 전에 쓰인 <오디세이> 같은 고전 한 편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더욱 오래 남는다.

오랜 전쟁과 방랑을 지나 마침내 돌아온 사람이 모든 것을 되찾았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을 돌아보는 길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나는 인도의 오래된 삶의 전통인 바나프라스타(Vanaprastha)​와 산냐사(Sannyasa)​를 떠올렸다.

힌두교의 전통적인 아슈라마 사상에서는 인간의 삶을 배움의 시기, 가정을 이루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시기, 세속적인 삶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바나프라스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산과 지위 같은 세속적 집착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유를 구하는 산냐사의 단계로 바라본다.

평생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달려온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는 더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씩 내려놓으며 자기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긴 여행 역시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젊은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떠났고, 그 후의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그 모든 여정을 지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첫 번째 여행에는 트로이라는 목적지가 있었고, 두 번째 여행에는 이타카라는 목적지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마지막으로 찾아가야 할 곳은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쩌면 그래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가 약 3,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괴물과 싸우는 이야기는 시대가 지나면 낡을 수 있고 전쟁 영웅의 이야기도 언젠가는 잊힐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3,00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디세이>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왜 3,000년 전의 고전을 지금 다시 영화로 만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영화는 단순히 영웅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전쟁과 욕망과 성공과 실패를 지나온 한 인간이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3,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각자의 바다를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나는 <오디세이>를 크리스토퍼 놀란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자 오래도록 기억될 21세기의 영화적 고전으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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