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인류 최초의 콘텐츠 IP였다 [이지효 교수의 한국사람 사는 이야기]

A courtyard inside the former Florio tuna-processing plant in Favignana, Italy, May 5, 2021. Favignana was used as a filming location for Christopher Nolan’s "The Odyssey", released in Italy on July 16, 2026. REUTERS/Igor Petyx

약 3천 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2026년 극장가를 다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The Odyssey)>가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면서 호메로스의 고대 서사시가 다시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들어왔습니다.

한국에서도 개봉 첫날 29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했고, 세계적으로는 14억 달러를 넘어서는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놀란 감독의 역대 최고 흥행작이자 R등급 영화의 세계 흥행 기록까지 새로 썼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일입니다. 최첨단 영상기술을 동원한 21세기의 관객들이 열광하고 있는 이야기는 최신 작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관이 아니고,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전승된 것으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서사시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겪는 10년간의 모험이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거대한 콘텐츠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콘텐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입니다.

하나의 성공한 이야기와 캐릭터를 영화, 드라마, 게임, 웹툰, 공연, 상품 등 다양한 콘텐츠로 확장하는 것이 IP 비즈니스의 핵심입니다.

마블과 디즈니가 대표적이고, 최근에는 한국의 웹툰과 웹소설 역시 드라마와 영화, 게임으로 확장되며 IP 산업의 중심에 서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류 최초이자 가장 오래 살아남은 콘텐츠 IP는 어쩌면 ‘신화’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 신화만 보더라도 제우스, 아테나, 아프로디테,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오디세우스처럼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수많은 캐릭터가 존재합니다.

이들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신화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새로운 인물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관을 확장합니다.

오늘날 콘텐츠 산업에서 말하는 ‘세계관 확장’과 크게 다르지 않고, 심지어 동일한 인물과 사건도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됩니다.

현대의 리메이크와 스핀오프, 프리퀄의 원형을 고대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셈입니다.

신화가 강력한 콘텐츠가 된 더 중요한 이유는 이야기 속에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질투, 욕망과 배신, 권력에 대한 갈망, 가족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 <오디세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괴물과 신이 등장하는 영웅의 모험담이지만 그 중심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한 인간’이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이 끝났음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로 바다에서 수많은 위기를 만나고, 유혹에 흔들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며 끊임없이 길을 잃습니다.

강인한 영웅이면서 동시에 실수하고 방황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시대가 달라져도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역시 목적지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직선보다는 수많은 선택과 우회로가 반복되는 긴 항해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콘텐츠 산업이 오히려 이러한 신화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영웅들부터 판타지 영화와 게임 속 세계관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화적 영웅과 서사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시련을 만나고, 익숙한 세계를 떠나 모험을 경험한 뒤 변화된 존재로 돌아오는 구조는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이야기의 공식입니다.

그렇다면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대에 우리는 왜 여전히 오래된 신화를 소비하는 것일까요?

콘텐츠를 전달하는 기술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인간이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고 싶은 질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인간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신화는 이러한 질문에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수많은 인간과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이제는 AI가 이야기를 만들고 가상현실이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는 시대가 되었고, 콘텐츠의 제작 방식과 플랫폼은 앞으로 더욱 빠르게 변화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사람들이 콘텐츠에서 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감정과 삶을 투영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3천 년 전 오디세우스가 다시 2026년의 극장으로 돌아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신화는 박물관에 보관된 오래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대한 이야기의 원천이며, 수천 년 동안 리메이크와 재해석을 거듭해 온 인류의 가장 오래된 콘텐츠 자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화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콘텐츠 IP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원조 스토리 유니버스’로 볼 수 있습니다.

 

작성자

  • 이지효,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
    jihy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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