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제도화 좌초…트럼프 이해충돌에 ‘클래리티법’ 초당 협상 파국

아이리시 오픈 참관하는 트럼프 [로이터]

‘클래리티법’, 상원 절차 표결에서 부결
찬성 49 대 반대 50…여당에서도 이탈
공화당 ‘고위직 밈코인 제한’ 수정안에도
민주당 ‘대통령 처분 의무’ 강수에 결렬
중간선거 휴회 감안, 연내 통과 불투명

가상화폐 시장을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하는 내용을 담은 ‘가상화폐 시장구조법(클래리티법)’의 입법이 연방 상원에서 좌초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가상화폐 시장을 활성화하겠다며 해당 법안에 힘을 실었지만 본인과 일가족의 사익 추구 문제가 역으로 발목을 잡았다.

미국 연방 상원은 15일 클래리티법을 본회의에 부치기 위해 절차 표결을 진행한 결과 찬성 49표, 반대 50표로 법안이 부결됐다고 밝혔다. 법안 진행을 위해 필요한 60표에 10표나 미달됐다. 이날 표결에서는 민주당 의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진 가운데 수전 콜린스(메인), 조시 홀리(미주리) 등 공화당 소속 일부 의원들도 등을 돌렸다. 현 연방 상원은 공화당 53석, 민주당 45석, 민주당 성향의 무소속 2석으로 구성됐다.

클래리티법은 그간 모호한 지위에 있던 가상화폐의 법적 지위와 규제 관할권을 명확히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비트코인 같은 디지털 상품의 현물 시장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관할하고 증권형 가상화폐는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감독하게 하는 방식이 핵심이다. 가상화폐 거래소, 중개인, 수탁기관, 탈중앙화 금융 등을 연방 규제 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소비자 보호와 거래 감시 기준을 적용하는 내용도 있다. 법안은 결제용 스테이블코인(가치 안정형 디지털 자산)에 대한 연방 정부의 감독 범위도 정의한다. 표면적으로는 규제법이지만 가상화폐를 처음으로 제도권 금융 상품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은 이를 산업 활성화 법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법은 지난해 7월만 해도 공화당 주도 아래 민주당 일부 의원들까지 가세한 초당적 지지를 얻으며 찬성 294표, 반대 134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연방 하원을 통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가상화폐 업계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상원을 향해 클래리티법의 조속한 입법을 촉구하기도 했다.

클래리티법이 상원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과 그 일가의 이해충돌 논란 때문이었다. 실제 미국 정부윤리청(OGE) 재산공개 보고서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에만 22억 달러(약 3조 원)가 넘는 소득을 올렸는데 이 가운데 가상화폐 관련 사업 수익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가족 소유의 가상화폐 기업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을 통해 5억 8800만 달러, 자신의 밈코인(특별한 기술적 목적 없이 온라인상의 인기를 기반으로 가치를 형성하는 코인)인 ‘$트럼프’를 통해 6억 3600만 달러, 스테이블코인 홀드코 지분 매각을 통해 1억 9700만 달러의 수익을 각각 거뒀다.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 트럼프그룹 부회장과 차남인 에릭 트럼프 트럼프그룹 부사장도 규제 완화를 등에 업고 가상화폐 사업으로 큰 수익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제정된 미국 연방 윤리법은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해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자산을 처분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두지 않는다.

상원 은행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엘리자베스 워런(매사추세츠) 의원은 표결 전 연설에서 “전국의 노동자 가구들이 물가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해서 수십억 달러의 가상화폐 이익을 챙기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마크 워너(버지니아) 의원도 “미국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법안을 통과시킬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의 밈코인 같은 가상화폐 발행을 제한하고 각 주(州) 법무장관에게 관련 집행권을 부여하는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주당은 대통령의 가상화폐 보유량이 일정 수준에 도달할 경우 처분을 의무화하는 이행 장치를 요구했고 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남은 촉박한 일정을 고려할 때 이 법안이 올해 연말까지인 119대 의회 회기 안에 통과될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 상원은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역구 선거 운동을 위해 다음 달 5일부터 휴회에 돌입한다. 클래리티법이 통과되려면 의원들이 의회로 복귀하는 11월 9일부터 연말까지 수정안에 극적으로 합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 1월 3일 120대 의회 회기 시작과 함께 자동 폐기된다.

미국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에 따르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가격은 상원 표결 소식이 전해진 직후 각각 장중 5%, 7% 이상 하락했다. 코인베이스 주가도 10.10% 급락했다. 비트코인을 84만 5000개 보유한 기업 스트래티지도 5.36%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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