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지지도 반대도 아닌 “몰랐다”… 조태용 국정원장의 생존법

이제 부터는 각자도생… 침몰하는 윤석열에서 탈출하는 공무원들 속출예상..

윤석열 대통령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 등을 불러내 ‘비상계엄’을 언급했다고 의심되는 자리입니다. 군 인사 외에 이들 자리에 등장한 또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조태용 국가정보원장입니다. “계엄 선포 당일 국무회의에 가서야 비상계엄에 대해 알았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윤 대통령이 ‘비상조치’ 혹은 ‘계엄’을 언급했다는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그런데도 조 원장은 여전히 “비상계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입장이지요.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요?

30년 외교통 조태용 국정원장의 ‘크루아상’ 화법

단서들을 추적해봅시다. 그의 발언 속에서 당시 인식을 엿볼 수 있는데요.

우리는 이따금 외교를 ‘크루아상’ 또는 ‘양파’에 비유하곤 합니다. 국가 간 관계를 개선하고 전쟁 같은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 말로 상대방과 겨루기 때문입니다. “외교에서 말을 잘 골라서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조지 슐츠 전 미국 국무장관의 말처럼, 외교관의 말에는 뼈가 있습니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 언어 하나하나에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죠. 크루아상처럼, 양파처럼, 의미가 겹겹이 함축돼 있습니다.

이 얘기를 왜 하냐고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조태용 원장은 잔뼈가 굵은 ‘외교통’입니다. 특히, 미국과 북한 이슈에 특화가 돼 있는 전문가로 꼽힙니다. 그만큼 그는 한 꺼풀 한 꺼풀 풀어야 진의를 알 수 있는 ‘외교 언어’에 능숙하죠.

그런 그의 화법은 ’12∙3 비상계엄’ 때도 확인됐습니다. 비상계엄 직후 국정원에서 열린 간부회의 당시 그는 윤 대통령이 소집한 국무회의 상황을 전하며 “반대라기보다는 우려 표명 정도”의 입장을 냈다고 말했습니다. 반대인 듯 반대 아닌 반대라는 것이죠.

계엄을 계기로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의 경질 사실이 논란이 되자 그는 홍 전 차장을 다시 내곡동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홍 전 차장이 자신에게 보고한 내용을 근거로 ‘오보’라는 입장을 밝혔죠. 하지만 홍 전 차장에게 계엄 선포 다음 날인 12월 4일 사직원을 제출하라고 했다가 6일 갑자기 그를 복귀시킨 사실은 뒤늦게 공개했습니다. 경질 아닌 경질 같은 경질입니다. 조 원장이 사직서를 제출하라면서 “대통령의 뜻”이라고 했다는 홍 전 차장의 주장에는 조 원장 자신의 건의로 경질이 이뤄졌다고 반박했죠.

‘계엄’이란 엄중한 상황 속 중요 순간 피한 조태용…우연 일치인가 책임 회피인가

외교 언어의 대전제는 ‘국가 이익 및 철학 수호’입니다. 그에 맞춰 외교부가 기리는 최고의 영웅은 고려시대 서희입니다. 거란에 당당하게 맞서 해야 할 말을 하면서 강동 6주를 얻어낸 그의 이름을 따 청사 리셉션홀을 ‘서희홀’로 명명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조 원장의 외교 언어는 ’12∙3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국가안전을 보장하고, 헌정질서를 지키는 데에 기여했을까요?

일단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최근 검찰 조사에서 조 원장은 지난해 3월 말~4월 초 대통령과의 삼청동 안가 회동 사실은 인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 원장은 “비상계엄 논의는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비상조치’를 들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비상계엄 직전 열린 국무회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 원장은 반대는 아니지만, 우려를 표명했다고 했죠. 그리고 윤 대통령으로부터 정치인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홍 전 차장의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방첩사령부와 협조하라는 취지의 지시만 있었다고 들었다’는 취지로 검찰에 진술했다고 합니다.

모든 의혹과 지적에서 살짝 빗겨간 답변들입니다. 자신은 비상계엄과는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발언들이지요. 그러나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암시하는 단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종합하면, 홍 전 차장과 조 원장이 대치하는 듯한 구도 속에 가려진 사실관계는

△조 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에 반대하지 않았고

△방첩사와 협조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는 취지로 홍 전 차장의 보고를 받았으며

△계엄 해제 직후 홍 전 차장에 대한 경질을 윤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것입니다.

계엄에 적극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 저지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국가안보실장’이었던 국정원장의 회피 언어, 국정원 신뢰회복에 도움 안돼

조태용 국가정보원장. 뉴스1이미지 확대보기

조태용 국가정보원장. 뉴스1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서 국정원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배경엔 ‘국내 정보’ 기능 폐지가 있었습니다. 전직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국정원이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대공수사권과 국내정보 기능이 사라진 덕분에 대통령의 지시를 받더라도 이를 따를 법적 근거가 없어 비상계엄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국정원의 국내 정보 기능이 살아있었다면, 대공수사권이 여전히 국정원에 있었다면,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하라는 대통령의 계엄지시에 원장은 반발했을까요? 정치인들의 위치 정보를 방첩사에 제공하라고 지시한 대통령의 지시에 불복했을까요? 비상계엄 사태 이후 조 원장이 밝힌 일련의 발언에 비춰 회의적입니다. 이른바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으로 한 번 무너졌던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질 것이라고 신뢰할 만한 시그널을 찾기 어렵습니다.

김규현 전 원장과 마찬가지로 외교부 출신인 조 원장은 지난 1년 내내 홍 전 차장과 알력 다툼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해외공작원 출신으로 정보 프레임을 새로 짜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나선 홍 전 차장과 달리 조 원장은 외교통으로서 정보 안정과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것으로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충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가안보’와 ‘국익’을 지키기 위한 갈등이어야 합니다. 초유의 비상계엄 사태를 겪고나니 조 원장이 그동안 과연 무엇을 추구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 원장은 국정원 수장으로 발탁되기에 앞서 대통령 바로 옆에서 대한민국 국가안보 전략과 정책을 보좌하는 컨트롤 타워를 맡았습니다. 윤 대통령이 2023년 12월 김용현 당시 대통령 경호처장과 여인형 방첩사령관을 불러들여 ‘계엄밖에 없지 않냐’는 발언을 했을 무렵 그는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낌새를 전혀 알지 못했다면, 왜 모를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제도적 혹은 구조적 공백으로 인해 대통령의 무모한 계엄을 막을 수 없었는지 이제라도 국민들에게 밝혀주는 것 또한 중요한 책무가 아닐까요.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기관을 이끌고 있는 조 원장이 이젠 회피를 위한 외교 언어를 던져버리고, 국정혼란을 끝내기 위한 명확한 언어를 사용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계엄에서 탄핵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정국에 조 원장의 이름 석자가 의미있게 새겨지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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