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협상 좌초되나…”우크라에 크림반도 포기는 ‘정치적 자살'”

Ukraine's President Volodymyr Zelenskiy is welcomed by South Africa's President Cyril Ramaphosa during a state visit, at the Union Buildings in Pretoria, South Africa, April 24, 2025. REUTERS/Siphiwe Sibeko TPX IMAGES OF THE DAY

트럼프 ‘현실인정’ 압박에 젤렌스키, 헌법·국민정서 탓 저항

‘영토강탈 인정’ 나쁜선례…국제사회, 세계질서 훼손 우려에 초조

러시아가 2014년부터 강제로 점령하고 있는 크림반도의 주권 문제가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의 새로운 난제로 떠올랐다.

전선 동결과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 등 기존 쟁점도 결코 단순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깊숙한 뿌리를 건드리는 일이라 협상이 좌초될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애초 협상의 조건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던 크림반도 문제는 미국이 러시아를 움직일 지렛대가 없다는 관측 속에 이달 불쑥 나타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17일(현지시간) 파리에서 프랑스·영국·독일 대표단과 만난 자리에서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방안을 조건 중 하나로 제시했다.

이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헌법에 위배된다”며 이를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크림반도는 논의의 초점조차 아니다”라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이 “평화협상에 매우 해롭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 종전 협상에서 영토 문제와 관련해 초점이 되는 부분은 헤르손·자포리자·루한스크·도네츠크 등 4개주에 걸친 동남부 전선의 동결이지 크림반도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가 10년 넘게 실효 지배하고 있는 크림반도가 협상 의제가 아니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일리가 있다.

3년간 전쟁으로 영토의 20%가량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크림반도를 되찾을 대상으로 보기에 힘든 게 현실적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충돌 발을 무릅쓰고도 크림반도 포기를 반대하는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국민 정서와 법적인 한계가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러시아가 갖은 기만술을 동원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할 때 받은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은 이른바 ‘리틀 그린 맨’이라고 불리는 부대 마크도, 휘장도, 계급장도 없는 부대에 의해 도둑질하듯 진행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의 개입을 부인하다가 각종 증거가 드러나자 뒤늦게 시인했다.

병합 당시에는 인명 피해가 크지 않았으나, 이는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4일 “우크라이나에서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것은 사기꾼에게 위험한 양보를 하는 것이자, 크림반도에 남겨진 국민들을 포기하고 이산가족의 재결합 희망까지 봉쇄하는 일로 받아들여진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 발발 한참 이전인 2010년 러시아에 크림반도의 해군기지 사용 연장을 허가해준 정치인들이 반역죄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비서실장 출신인 콘스탄틴 옐리세예프는 “법적으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내주는 데 찬성할 정치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며 “정치적 자살을 능가하는 자충수”라고 말했다.

법률적·절차적 걸림돌도 있다. 영국 BBC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헌법 제2조는 자국의 주권이 변경될 수 없는 현재 국경선 안 전체에 미친다고 규정한다.

법적으로 현재 영토의 범위를 변경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거쳐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 계엄령 상태인 우크라이나에서는 헌법을 개정할 수도 없다.

반면 러시아의 시각에서 크림반도 병합은 과거의 ‘실책’을 바로잡는 일이다.

제정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인 1783년 러시아에 편입된 크림반도는 1954년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연방 공산당 서기장에 의해 우크라이나로 편입됐다.

당시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소련의 일원이었으므로 대수롭지 않은 행정구역 조정이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크림반도도 함께 독립했다.

독립 이후로도 크림반도는 관광산업 등으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약 200만명 인구 중 절반 이상이 러시아인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는 원래 크림반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타타르인이 스탈린 체제하에서 대규모 강제 이주를 당한 영향이 크다. 현재도 크림반도 인구의 약 15%가 타타르인이다.

정작 크림반도 주민들이 어느 나라의 지배를 받고 싶어 하는지, 실제 여론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러시아는 2014년 강제 병합 직후인 3월 주민투표를 시행했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NYT는 “러시아의 점령 이후 많은 거주자가 인터뷰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병합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신뢰할 수 있는 여론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무력 사용을 통한 영토 탈취를 금지하는 국제법 위반 행위를 승인하는 셈이라 국제사회의 반발도 초래할 수 있다.

확고한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는 이 같은 나쁜 선례가 정착하면 확장주의 성향을 지닌 강대국 주변 약소국들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의 책임을 물어 세계질서 붕괴를 막기 위해 별도의 대러시아 제재까지 가동해왔다.

이번 사태를 두고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크림반도에 러시아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도 첫 집권 당시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2018년 크림반도 선언을 통해 “어떤 나라도 무력으로 다른 나라의 국경을 바꿀 수 없다”며 국제사회의 원칙을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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