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도 예방도 아닌 공공정책 포기..
글 | 라디오서울 뉴스데스크 칼럼
미국 곳곳, 특히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는 이제 날락손(Naloxone) 이 담긴 자판기가 설치되고 있다.
겉보기엔 인도주의적 조치이고, 공공보건의 전진 같지만, 이 작은 기계 안에는 시대의 절망과 타협이 공존하고 있다.
생명을 살리는 자판기, 그러나 누구의 책임인가?
날락손은 아편계 약물 과다복용 시 호흡을 되살리는 약이다. 펜타닐과 같은 합성 마약으로 매일 수천 명이 쓰러지고 있는 미국에서, 이 약은 거의 “마약 시대의 심장충격기” 처럼 쓰이고 있다.
자판기라는 형식은 빠르고 접근성이 높아 확실히 실용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기계가 치료도 아니고 예방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죽지 않게만 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것이 공공정책의 전부라면, 그건 의료가 아니라 항복이다.
마약과의 전쟁은 끝났고, 그 끝은 조용했다
한때 미국은 “War on Drugs(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하며 마약 유통망을 단속하고, 중독자에게 형사처벌을 가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마약상 대신 거리에서 무너진 젊은이들을 보고 있고, 감옥 대신 자판기를 세우고 있다.
이제 사회는 싸우는 대신 ‘타협’하고 있다. ‘중독은 어차피 생길 것이니, 최소한 죽지만 말자’는 접근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책의 체념, 정치의 후퇴다. 죽음은 막지만, 생의 방향은 묻지 않는다.
과연 이것이 진보인가?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인도적 조치”라며 날락손 자판기를 지지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생존만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 과연 진보인가?
죽음을 막는 것은 시작이지 결론이 아니다. 왜 사람들은 마약에 손을 대게 되었는지, 그들을 붙잡아줄 공동체는 왜 사라졌는지, 그 고통은 왜 제도 안에서 치유되지 않는지, 거기에 답을 하지 못한 채 약물만 나눠주는 건 위선의 연출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날락손 자판기는 증상에 반응하지만, 병을 고치지는 않는다.
그 병은 외로움이고, 절망이며, 무너진 가족과 공동체, 붕괴한 도덕 기반이다.
과거의 사회는 중독자를 교회로, 집으로, 친구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오늘의 사회는 그들에게 자판기와 플라스틱 앰플을 건넨다.
한 사회가 어디까지 내려왔는지는, 그 사회가 생명을 얼마나 지키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직 말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날락손 자판기,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장치인 동시에 우리 시대가 마약과의 전쟁에서 조용히 손을 든 상징이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살게 하지는 못하는—그 어중간한 책임 회피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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