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으로 쪼개져 싸우는 나라… 왜 자꾸 타인을 계몽하려 하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오른쪽·메릴 스트립)와 앤디(앤 해서웨이). 퍼스트런·글뫼 제공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계속 싸워? 좀 사이좋게 지내면 안 돼?” 최근 집 앞을 걷던 중 서로를 비방하는 정치인들의 현수막을 보고 아이가 내게 물었다. 사람들마다 답은 다 다를 텐데, 정신과 의사인 내 대답은 이러했다. 

“정치인들 중에는 원래 나르시시스트라고 불릴 사람이 많아. 사실 일반 사람들에겐 국가를 운영하는 큰 자리에 올라간다는 건 되게 책임지기 무서운 일이거든. 그런데 그걸 나만 할 수 있다고 우기고 거짓말도 잘하는 건 뇌가 좀 달라서 그래.”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국한된 모습은 아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끝없이 다투는 지지자들도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정치 성향의 차이로 다투었다는 이야기도 진료실에서 심심찮게 전해 듣는다. 가끔은 어느 쪽에 투표할지 내게 묻는 분도 있다.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질문을 돌려 지지하는 이유를 묻는다. 그 사람의 마음을 추가적으로 들여다볼 좋은 기회이니까. 그럴 때 종종 이런 답변들을 듣게 된다.

“저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거든요.”

“아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사람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것이 당연하기에 정답은 없다. 문제는 이들의 대답 속에 숨겨진 뉘앙스이다. 자신과 같은 답을 고르지 않는다면 양심이 없거나 지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뉘앙스. 더 신기한 것은 평소에 굉장히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유독 더 이런 숨겨진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타인 착취하는 나르시시스트의 비밀

이러한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기에 좋은 영화가 있어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한다. 나르시시스트를 그려낸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앤디가 자신의 꿈인 기자를 뒤로 하고 최고의 패션 매거진 런웨이에 비서로 취업하면서 시작된다. 비서로서 보필해야 할 사람은 업계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총편집장 미란다로, 엄청나게 권위적이고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이다. 

미란다는 직원들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도구처럼 착취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은 타인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며, 말 잘 듣는 도구로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길들이는데 있어 천부적 재능을 보인다. 이는 특별히 지능이 높아서가 아니라, 죄책감과 공감 능력의 부재에서 나오는 특성이다. 타인의 입장과 고통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기에 이런 비인간적 행동이 가능하다. 엄청난 업무량을 계속 건네 지치게 만들고, 그걸 못해낸 이들에게 분노를 퍼붓는다. 이 과정의 반복 속에 자존감이 저하된 이들이 무력하게 그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퍼스트런·글뫼 제공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퍼스트런·글뫼 제공

이 나르시시스트들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엄청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만, 사실 이는 무의식 속 거대한 열등감이나 불안감을 감추려 만들어진 가면인 경우가 많다. 열등감과 불안감을 덮기 위해 자신을 추앙해주는 존재들이 필요한 것인데, 그야말로 자존감 흡혈귀들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란다 역시 이러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영화 속에 드러난다. 아무도 모르던 자신의 가정 불화를 우연히 목격한 앤디에게 아직 출간되지 않은 해리포터 소설 다음 원고를 구해오라는 수행 불가능한 미션을 뜬금없이 내린다. 그저 어처구니없고 의미 없는 화풀이처럼 보이지만, 이는 자신의 약점을 알아챈 앤디를 무능한 실패자로 만들어 스스로의 높은 지위를 지키려는 미성숙한 심리가 담긴 행동이다.

이렇듯 대놓고 우월성을 뽐내며 타인들을 착취하는 심리를 ‘외현적 자기애’라고 부른다. 이 심리의 대명사 같은 미란다로 인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나르시시스트와 그 피해자를 그려낸 영화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앤디의 성격 역시 무언가 일반적이지 않다. 앤디는 회사와 해당 업계에 대한 배경지식을 전혀 알아보지 않은 상태로 첫 출근을 한다. 패션업계의 일인자인 상사가 화보에 들어갈 벨트를 고르는데 ‘그게 그거 아닌가요?’라는 식의 실소를 터뜨리며 패션업계 자체를 은근히 무시하고 폄하하는 뉘앙스를 비친다. 애당초 관심도 없었고 앞으로 뜻이 있는 직역도 아닌데, 미란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괴롭힘을 계속 견디고 도전한다. 분명 성격 좋은 사람으로 보이나 남자친구나 직장동료와의 관계에서 이기적인 선택들을 한다. 

이렇듯 겉으로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은근한 우월감을 지니고 있기에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자기중심적 심리를 ‘내현적 자기애’라고 부른다. 이렇듯 미란다와 앤디는 둘 다 자기애성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 정도나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있지만, 이것을 알아본 미란다는 앤디를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여기게 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 퍼스트런·글뫼 제공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 퍼스트런·글뫼 제공

미란다뿐 아니라 앤디까지 나르시시즘을 띠고 있다는 의견에 ‘정신과 의사들은 모든 사람을 환자로 만들려고 하지!’라며 반감이 드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온갖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고, 그래서 과잉 진단을 특히 더 경계해야 된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자기애가 있다고 해서 다 병적인 것은 아니다. 내게도 역시 자기애가 있다. 적당한 자기애는 당연한 것이고 건강한 정신을 위해 필수적이기도 하다. 앤디 역시 내현적 자기애를 통해 미란다의 공격으로부터 버틸 수 있었고, 그러다 예상치 못한 성장의 기회를 얻게 된다. 

미란다의 과도한 자기애는 타인들에게 해를 주기 때문에 분명 병적 수준이지만, 그 역시 외현적 자기애를 통해 경쟁이 치열한 사회 속에서 우두머리 사자처럼 자신의 위치를 굳건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앤디에게 감정이입되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미란다에게도 공감이 된다는 반응들도 많다. 사회 생활을 하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가면을 쓰고 살아야 되는가를 어른이 되면 될수록 느끼기에 그런 것 아닐까.

한국에 ‘숨은 나르시시스트’가 많은 이유

영화가 아닌 현실에도 미란다 같은 사람들이 가끔 있지만, 앤디처럼 속에 숨긴 나르시시즘을 지닌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 내현적 자기애는 외현적 자기애에 비해 덜 병적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덜 유해하지만, 그래도 건강한 대인관계 형성에 지장을 준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내현적 자기애를 키운다. 우리나라의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는 어릴 때부터 끝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 노출되고, 여기서 오는 우월감과 열등감, 남들만큼 해내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그 뿌리는 같으며,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들을 먹으며 과도한 자기애가 자라난다. 

그런데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이 사회에서 자기애를 드러냈다가는 질타의 대상이 되기 쉽기에, 사회의 미덕이라 불리는 겸손 속에 숨긴다.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있고, 그래서 은근히 자랑하고 은근히 깔본다. 학벌과 직업, 재산, 거주지, 차량 같은 기준으로 줄 세우는데 집착한다.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생각이 다르니 설득이 잘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 타인을 계몽하려 한다. 그래도 끝내 의견이 통일되지 않으면 상대방의 양심 부족과 지능 부족을 탓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와 앤디. 퍼스트런·글뫼 제공'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와 앤디. 퍼스트런·글뫼 제공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와 앤디. 퍼스트런·글뫼 제공’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와 앤디. 퍼스트런·글뫼 제공

이 글에도 비판과 비난의 반응들이 매우 당연하게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관찰되는 대화법은 상대방의 말에 일단 ‘아니야!’라며 부정 의견을 첫 마디에 못 박고 시작하는 방식이다. 전문가의 의견은 더욱더 그 화법의 대상이 되기 쉽다. 반박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이 확인되는 느낌을 더 크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다름이 아닌 틀림’도 있기에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고 때로는 적극적 반박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틀림이 아닌 다름’인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이 우리 세상이다. 세상이 매번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 우열로만 나뉘지 않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서로의 간극을 좁혀 나갈 수 있다. 건설적 논의가 가능해진다.

이번 대선 결과가 나오기까지, 나온 후에도 우리나라가 또 반으로 나뉘어 시끌벅적할 테다. 그 와중에 상처주는 말들을 내뱉거나 듣게 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상대방 입장이 너무 이해가지 않거나 너무 미울 수도 있을 테다. ‘타인에게서 불편감을 느끼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칼 융의 말처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자신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미란다의 요구를 거절하고 더 이상 악성 나르시시즘의 길로 가지 않은 앤디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변화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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